제9장: 피의 대면
태오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의 지퍼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렸다. 금속 지퍼가 맞물리며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카페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사내들의 시선이 가방 안으로 쏠렸다. 그들의 눈에는 탐욕과 경계가 뒤섞인 기묘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태오는 가방의 입구를 살짝 벌려, 그 안의 서류들이 안개 섞인 습기를 머금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게 당신들이 그토록 찾는 물건인가?"
태오의 물음에 사내 중 하나가 헛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물건이라니, 말조심해. 그건 우리가 관리해야 할 '자산'이다."
그의 말은 오만했다. 태오는 그 오만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이 도시의 법보다 위에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태오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카페 유리창 너머 어둠 속을 응시했다. 저 너머, 안개가 가장 짙게 깔린 곳에 박 실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를 불러내기 위한 신호는 이미 이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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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 끝자락, 버려진 창고의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검은색 세단에서 내린 박 실장은 코트 깃을 세운 채 안개를 헤치며 걸어 들어왔다. 그의 발소리는 규칙적이고 여유로웠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승리자의 태도로 태오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를 향해 다가갔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박 실장의 목소리가 카페 문턱에 닿았다. 사내들이 길을 터주자, 그는 마치 거대한 성채의 주인이 입성하듯 카페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눈은 태오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가방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되찾으려는 냉혹한 집착에 가까웠다.
"그 가방을 내놓으면, 네가 원하던 평온을 살 수 있을 거다. 아니, 평온은 아니더라도 죽음만큼은 피하게 해주지."
박 실장의 제안은 달콤한 독약이었다. 태오는 그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평온이라...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참 우습네. 당신이 만든 이 도시에서 평온이 존재하기나 하나?"
태오는 가방을 조금 더 앞으로 밀어냈다. 박 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이 많군. 물건만 넘겨라. 불필요한 감정은 섞지 말고."
"감정? 아니, 이건 감정이 아니라 확인이야. 당신이 이 판을 어떻게 짜놓았는지 말이지."
태오가 가방을 열어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시장의 이름이 적힌, 피로 얼룩진 설계도였다. 박 실장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는 그 서류가 가진 파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걸...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내가 감당하는 게 아니야. 이 종이들이 세상을 흔드는 거지."
태오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박 실장의 뒤편,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박 실장님, 당신의 사냥개는 너무 늙어서 그런지, 이제 주인도 못 알아보는 모양이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최 형사였다. 그는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 박 실장의 곁을 지키며 태오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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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형사의 등장은 현장의 공기를 급격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박 실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최 형사, 왜 이제야 나타난 건가. 이미 상황은 정리된 것 같은데."
"정리라... 글쎄요. 제가 보기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최 형사는 태오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아까 은신처에서 보여주었던 냉소와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자의 잔인한 만족감이었다.
"태오야, 네가 꿈꾸던 정의라는 게 고작 이 종이 뭉치였냐? 이 도시를 뒤엎을 수 있다고 믿은 거야?"
태오는 최 형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배신감보다 더 깊은, 환멸이 서려 있었다.
"당신은 경찰이 아니었어. 그냥 박 실장의 손을 빌려 시체를 치우는 청소부였을 뿐이지."
"청소부라... 표현이 거칠군."
최 형사가 가죽 장갑을 고쳐 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야, 때로는 눈을 감는 법을 배워야 해. 네가 쥐고 있는 그 장부가 빛을 발하는 순간, 너는 이 도시의 모든 빛을 잃게 될 거다. 내가 보증하지."
태오는 실소했다. 최 형사는 박 실장의 충직한 사냥개였다. 그는 법의 이름을 빌려 범죄를 은폐하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자들을 소리 없이 지워버리는 도구였다. 아까 그가 말했던 '흔적을 지워준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차가운 안개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당신 같은 인간들이 있어서, 이 도시가 썩어가는 거야."
태오의 말에 박 실장이 낮게 읊조렸다.
"그만해라. 시시한 말싸움은 여기까지다. 물건을 넘겨."
태오는 가방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었다. 그리고는 가방 안의 서류를 한 장씩 허공에 뿌리듯 던졌다. 젖은 종이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축축한 소리를 냈다.
"이걸 가져가서, 당신이 만든 그 가짜 왕국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직접 확인해 봐."
태오의 눈빛은 이제 절망을 넘어선 무언가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줄 알면서도 끝내 멈출 수 없는, 파괴적인 의지였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당신들이 만든 이 지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태오의 선언과 함께, 카페의 조명이 불길하게 깜빡였다. 안개는 더욱 거세게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고, 공기는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기괴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박 실장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도박의 주사위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