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붕괴하는 자아의 끝

재가 된 성좌의 노래 · 약 7분

이안은 펜을 쥔 손가락 끝이 마비되는 감각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종이는 이미 물에 불어 흐물거렸고, 그가 새겨 넣는 문장들은 잉크의 번짐과 빗물의 세례 속에서 끊임없이 형체를 잃어갔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가 붙들고 있는 이 이름들이, 이 문장들이 공중으로 흩어져 영원히 사라질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성흔의 비는 이제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근간을 갉아먹는 거대한 파도였다. 이안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썰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뇌리에 박힌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하얗게 탈색되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 그것은 공포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지옥 같은 전선에 서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얼굴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니야... 지워지게 두지 않아."

이안은 신음하듯 읊조렸다. 그는 눈앞에 쓰러진 강민을 보았다. 강민은 이제 전사의 용맹함도, 영웅적인 기개도 보이지 않는, 그저 성흔의 비가 빚어낸 기괴한 생명력에 몸을 맡긴 채 늘어져 있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영웅적 서사'는 이제 이안의 수첩 속에만 존재했다. 현실의 강민은 자아를 잃어가는 괴물이 되어갔으나, 이안의 기록 속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을 지키려 했던 고귀한 전사로 박제되어 있었다.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뒤졌다. 그는 자신의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더 필사적으로 기록에 매달렸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유일한 밧줄이었다. 그가 동료들의 이름을 적는 행위는, 자신이 아직 인간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의식이었다.

그때, 이안의 시야가 일렁였다. 성흔의 비가 그의 의식을 더욱 강하게 압박해왔다. 빗소리가 고막을 찢는 소음이 되어 뇌를 때렸고, 그 사이로 파편화된 기억들이 튀어 올랐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참 동안이나 허공을 응시했다. 그가 방금 전까지 무엇을 적고 있었는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조차 순간적으로 망각했다.

"이안... 내 이름이... 뭐였지?"

그것은 강민의 목소리였는가, 아니면 이안 자신의 환청이었는가. 이안은 고개를 돌려 강민을 보았다. 강민은 이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그저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안은 공포에 질려 수첩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은 정말로 사라지는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자는 잊히고, 잊히는 것은 죽음보다 더 지독한 형벌이라는 한결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이안은 필사적으로 수첩을 펼쳐, 아직은 선명한 문장들을 눈에 담았다. [강민은 오늘, 자신의 이름을 잃어가는 공포 앞에서도 가장 용감한 영웅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 문장을 다시 한번 읽었다.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그는 그것을 되새겼다. 그는 자신이 기록자가 되는 것만이, 이 멸망의 끝에서 그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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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시야조차 확보되지 않았다. 이안은 빗줄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지윤의 흔적을 보았다. 그녀는 이제 식물과 엉킨 채로, 자아의 파편이 흩어진 잔해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안을 부르지 않았고, 그 역시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이 안개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이안은 수첩을 꽉 쥐었다. 그의 손가락은 이제 하얗게 질려 있었고, 펜을 쥔 손등에는 굵은 정맥이 솟아 있었다. 그는 기록했다. 지윤의 공포에 대하여. 그녀가 잃어가는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녀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하여. 하지만 그가 쓰는 글자들은 채 마르기도 전에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잊지 않겠어. 절대 잊지 않아."

이안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조차 성흔의 비에 의해 마모되어 갔다. 그는 자신이 기록하는 것이 사실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미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밧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타인의 이름을 적음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들의 고통을 문장으로 옮겨 적음으로써 자신이 아직 '인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증명받고 있었다.

이안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전선은 이제 전쟁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장례식장이었다. 성흔의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병사들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가 파괴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서로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보급은 끊겼고, 지휘 체계는 붕괴했다. 이제 군대는 승리를 쟁취하는 조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며 죽음을 기다리는 장례 행렬로 변모해 있었다.

이안은 그때, 한결이 말했던 그 찢어진 군기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었다. 한결은 그 군기를 지키기 위해 이 모든 참혹함을 견뎠다고 했다. 그 군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단순히 승리의 상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결이, 혹은 그가 속했던 군단이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기억'의 파편이었을 것이다. 한결은 그 군기를 지키기 위해 전선을 유지했고, 이안은 수첩을 지키기 위해 기록을 이어갔다.

결국 그들은 같은 목적을 가졌으나,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한결은 파괴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려 했고, 이안은 기록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박제하려 했다. 두 사람 모두, 이 지옥 같은 전선에서 인간이 무엇을 지키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그러나 처절한 답을 내놓고 있었다.

"당신이 무엇을 지키려 하든, 당신의 방식이 옳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하지만 나는 믿어. 기록되지 않은 자는 잊히지만, 기록된 자는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억된다는 것을."

이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이제 알았다.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한결까지,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는 속도는 성흔의 비가 쏟아지는 강도와 비례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존재의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워져 가는 문장들 사이에서, 아직은 온전한 그들의 이름을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은빛 비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며 대지를 적셨다. 이안은 펜을 꽉 쥐었다. 그는 이제 이 지옥의 유일한 증언자가 되어, 사라져가는 이들의 이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젖은 종이 위에 마지막 필적을 남겼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비명보다 더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이제 기록자가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세계의 파편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존재를 증명하려는 고독한 파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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