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는 이름들
빗소리는 이제 소리가 아니라 고막을 짓누르는 물리적인 압력이 되어 돌아왔다. 이안은 젖어 들어서 묵직해진 수첩을 가슴에 품은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풍경을 응시했다. 전선은 더 이상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자아를 잃어가는 자들이 쏟아내는 비명과, 그 비명을 억누르려는 자들의 처절한 사투가 뒤섞인 거대한 도살장이었다.
"이안... 내 이름이... 뭐였지?"
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해 터져 나온 비명에 가까웠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민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지키며 포효하던 그 용맹한 전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넋이 나간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흔의 비가 닿은 그의 피부 위로 돋아난 초록색 덩굴은 이제 혈관을 타고 올라와 안구와 이마 근처까지 뻗어 있었다.
"강민, 네 이름은 강민이야. 너는 나를 지키는 가장 용감한 돌격병이지. 잊지 마, 내가 여기 적어두고 있어."
이안은 필사적으로 대답하며 수첩을 펼쳤다. 하지만 펜촉이 종이를 가르는 소리는 비명 속에 묻혔고, 그가 써 내려가는 글자들은 채 마르기도 전에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강민의 눈동자 속에서 번뜩이던 기묘한 광채는 이제 불꽃처럼 타오르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자아를 집어삼키는 성흔의 저주이면서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생명력을 쥐어짜는 처절한 저항의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전방의 안개를 뚫고, 혹은 그 안개 자체가 찢어지며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전투 준비! 놈들이 온다!"
이안의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군대였다. 아니, 한때 인간이었던 무언가들이었다. 적군의 병사들은 이제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전술을 구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흔의 비에 완전히 침식되어, 동료의 시신을 짓밟고 지나가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이제 전략도, 증오도, 목적도 없었다. 오직 성흔이 부여한 파괴적인 생명력만이 존재했다.
"이안, 저놈들 봐... 저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강민이 이를 악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느끼는, 지독하게도 인간적인 굴욕 때문이었다.
"내가... 내가 누구인지 잊기 전에, 저것들을 베어버려야 해!"
강민은 포효하며 돌진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어 했다. 이 지옥 같은 전장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타인을 죽이는 행위뿐이라는 사실이 그를 더욱 처절하게 몰아넣었다. 이안은 그의 뒤를 받치며 총구를 고쳐 잡았다. 총성은 은빛 비 사이로 파편처럼 튀었고, 화염은 찰나의 순간에 꺼졌다.
적들은 죽지 않았다. 성흔의 비가 그들에게 부여한 죽지 않는 육체는 고통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잘려 나간 팔다리에서 자라나는 기괴한 식물들은 그들을 더 거대한 괴물로 변모시켰다. 이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보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아를 잃어가는 자들이 서로를 파괴하며, 자신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강민! 정신 차려! 네 이름을 잊지 마!"
이안은 소리쳤으나, 강민은 이미 반쯤 미쳐버린 눈으로 허공을 베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화려했으나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안은 그가 쏟아내는 검기의 궤적을 눈에 담았다. 그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그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무너져 가는지. 그는 기록해야 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보여주는 이 처절한 투쟁이, 그가 인간으로서 남기는 마지막 문장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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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끝이 없었다. 아니, 끝이 나지 않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안은 쏟아지는 화염과 비명 속에서 숨이 막혔다. 빗물과 땀, 그리고 동료들의 피가 섞여 그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수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지만,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보았다. 강민이 적의 목을 베어 넘기며, 동시에 자신의 자아를 잃어가는 것을. 강민의 눈동자가 점점 더 흐릿해지며, 그 속에 깃든 광채가 그의 의식을 집어삼키는 것을. 이안은 그 찰나의 순간을 문장으로 옮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펜을 움직였다.
'강민은 오늘, 자신의 이름을 잃어가는 공포 앞에서도 가장 용감한 영웅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아직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글자는 빗물에 젖어 번졌지만, 이안은 그 문장이 지워지기 전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지기를 기도했다.
그때, 전선의 뒤편에서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아니, 그것은 냉기라기보다 극도의 정적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적군의 지휘관, 한결이 서 있었다. 그는 이 아비규대한 난장판 속에서 홀로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의 갑옷은 은빛 비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고, 그의 눈은 모든 것을 초탈한 듯 무미건조했다.
"기록하고 있나, 기록병?"
한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것은 비명이나 포효와는 대조되는, 지독하게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그는 이안의 손에 들린 젖은 수첩과, 그가 필사적으로 기록하려는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쓰는 그 글자들이 이 비를 이겨낼 수 있다고 믿나?"
한결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뒤로 자아를 잃고 울부짖는 괴물들이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는 그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기록은 존재를 증명하지. 하지만 이곳에서 증명되는 것은 오직 소멸뿐이다. 네가 이름을 적을 때마다, 성흔은 그 이름의 의미를 지워버리지. 결국 남는 것은 잉크의 얼룩과, 이름 없는 시체뿐이다."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결의 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이안은 펜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기록되지 않은 자는 죽은 것과 같다. 나는 그들이 죽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이안의 대답에 한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것은 냉소적인 비웃음이었을까, 아니면 동질감 어린 탄식이었을까. 한결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증명이라... 가련한 인간의 욕망이군. 하지만 네가 틀린 것은 하나 있다. 기록되지 않은 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것이다. 잊히는 것은 죽음보다 더 지독한 형벌이지."
그 순간, 전방에서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자아를 잃은 괴물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고, 강민의 비명소리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한결은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계속해 보아라.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이름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수첩을 꽉 쥐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와 비명 속에서, 이제는 한 명의 병사가 아닌, 존재의 파편을 붙잡으려는 파수기으로서의 필사적인 기록을 시작했다. 그의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비명보다 더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