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적의 얼굴을 한 그림자

재가 된 성좌의 노래 · 약 7분

빗소리는 이제 비명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아우성으로 변해 있었다. 이안은 젖은 수첩을 가슴에 밀착시킨 채, 짐승처럼 울부짖는 괴물들의 파상공세를 견뎌냈다. 그의 시야는 빗줄기와 튀어 오르는 혈흔, 그리고 성흔의 비가 빚어낸 기괴한 초록색 덩굴들로 인해 흐릿하게 일렁였다. 그때, 전장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며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적의 공격이 멈췄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전장의 흐름을 끊어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결이 서 있었다. 그는 방금까지 짐승처럼 날뛰던 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배처럼 흔들림 없이 이안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검은 갑옷은 은빛 비를 머금어 더욱 무겁고도 처참한 빛을 발했고, 그의 눈은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지켜보며 비탄에 잠긴 관찰자의 눈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기록병."

한결의 목소리는 빗줄기를 가르고 이안의 귓가에 꽂혔다. 그는 이안의 손에 들린 젖은 수첩과, 그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그 보잘것없는 종이 뭉치를 가리켰다.

"네가 쓰는 그 글자들은 이제 이 비를 이겨낼 수 없다. 봐라, 네 동료들의 눈동자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들은 이미 이름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성흔이 부여한 생명력에 휘둘리는 육신이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들의 이름을 적으며 자신을 속이고 있나?"

이안은 대답 대신 수첩을 더욱 꽉 쥐었다. 손가락 끝이 저려왔지만,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분명했다.

"속이는 것이 아니야. 기록은 그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당신은 그저 포기한 것뿐이지. 당신은 그들이 잊히는 것을 지켜보며, 그저 관찰자로 남기를 택한 거야."

한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소라기보다는 깊은 탄식에 가까웠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갑옷이 이안의 가슴팍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관찰자가 아니라, 생존자다. 나는 내 부하들이 인간으로 죽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지옥을 지탱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이 전쟁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쪽을 택했지. 너는 그들을 기록하지만,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이 전선을 유지한다. 무엇이 더 숭고한 투쟁인가?"

한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이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는 기록을 통해 그들을 남기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자아가 마모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이 모든 참혹함을 견디고 있다.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졌으나, 방법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기억해라. 네가 적어 내려가는 그 문장들이, 저 하늘이 쏟아내는 망각의 파도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이안은 한결의 말을 들으며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펜을 움직였고, 한결은 파괴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려 했다. 두 사람 모두, 이 지옥 같은 전선에서 인간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었다.

"당신이 무엇을 지키려 하든, 당신의 방식이 옳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하지만 나는 믿어. 기록되지 않은 자는 잊히지만, 기록된 자는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억된다는 것을. 나는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유일한 흔적이 되기 위해 쓰는 거야. 그것이 내가 인간으로 남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이안은 말을 마치고, 자신의 가슴팍에 매달린 낡은 은색 문장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것은 그가 이 지옥 속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이정표였다. 한결은 그 문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문장 말이다... 그것이 네가 지키는 것들의 증거인가?"

한결의 질문에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수첩을 내려놓고 가슴에 달린 문장을 펼쳐 보였다. 은색의 표면에는 빗물에 씻겨 희미해졌으나 여전히 선명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이안이 그동안 지켜온 동료들의 이름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이름이다. 내가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새긴 기록이다."

한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경악과 동질감이 교차했다. 그는 이안이 짊어진 무게가 무엇인지, 그가 어떤 고통을 견디며 이 기록을 이어오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은 듯했다.

"이름이라... 결국 너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군. 너는 그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나는 그들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전선을 지켰다. 우리는 같은 지옥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거야."

한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이제 적의 지휘관이 아니라, 같은 절망을 공유하는 고독한 인간으로 보였다. 그는 검을 바닥에 꽂았다. 빗소리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이는 대신,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묻는 처절한 대화를 나누었다.

"기록병, 네가 쓰는 그 글자들이 언젠가 이 비를 이겨낼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네가 그 이름을 지키려 애쓰는 그 순간만큼은, 너는 분명히 인간이다."

한결은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안에게 어떤 약속도, 승리의 보장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깊은 경의가 담겨 있었다.

"계속해라. 네가 기록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이름을 지켜라. 그것이 이 지옥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다."

한결은 그대로 뒤를 돌아 전장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뒷모습은 마치 무너져 내리는 성벽과도 같았으나, 그가 남긴 말은 이안의 가슴에 깊은 낙인처럼 남았다.

이안은 다시 수첩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은 이제 감각이 거의 없었지만, 그는 펜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는 이제 알았다.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한결까지,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는 속도는 성흔의 비가 쏟아지는 강도와 비례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존재의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워져 가는 문장들 사이에서, 아직은 온전한 그들의 이름을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은빛 비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며 대지를 적셨다. 이안은 펜을 꽉 쥐었다. 그는 이제 이 지옥의 유일한 증언자가 되어, 사라져가는 이들의 이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젖은 종이 위에 마지막 필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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