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승리 없는 전쟁의 지옥도

재가 된 성좌의 노래 · 약 6분

"속이는 것이 아니야. 기록은 그들이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이며, 내가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은 죽지 않아."

이안의 목소리는 젖은 흙바닥에 눌린 짐승의 울음과도 같았다. 그는 수첩을 가슴에 바짝 끌어당겼다. 한결은 그 처절한 고집을 마치 흥미로운 유희를 관찰하는 학자처럼 응시했다.

"증명이라... 하지만 보아라. 네가 기록하는 그 이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비에 씻겨 내려가고 있다. 네가 한 문장을 써 내려갈 때, 성흔은 그 문장의 의미를 앗아간다. 결국 네가 남기는 것은 종이 위의 얼룩이지, 그들의 영혼이 아니다."

한결이 차갑게 쏘아붙였으나, 이안은 고개를 들어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비는 더욱 거세게 쏟아졌고, 전장은 이제 전쟁이라기보다 거대한 장례식의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승리라는 개념은 이미 증발했다. 이곳에 남은 것은 영토를 뺏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자아라는 가느다란 실타래가 끊어지기 전에 단 한 순간이라도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뿐이었다.

이안은 시선을 돌려 자신을 둘러싼 참혹한 풍경을 보았다. 전선 곳곳에서는 동료였던 병사들이 서로를 뜯어먹거나, 혹은 허공을 향해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자아를 잃어가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죽지 않는 육체를 얻었으나, 그 육신을 지탱하던 '나'라는 존재는 성흔의 비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그는 다시 수첩을 펼쳤다. 손가락이 마비될 것 같은 추위와 습기 속에서도 그는 펜을 쥐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것이 이 지옥에서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유일한 생존 법칙이었다.

그는 지윤의 이름을 적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보여준 그 공포에 찬 눈망울,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그를 향해 뻗어왔던 그 떨리는 손길. 그는 그녀가 지키려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녀가 어떤 의무병이었는지를 문장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가 한 문장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성흔의 비는 잉크를 짓눌러 글자를 뭉개뜨렸다. 마치 세상 자체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듯이.

이안은 이를 악물고 다시 썼다. 그가 문장을 반복해서 쓰는 속도보다, 성흔의 비가 그들의 기억을 마모시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는 이제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라져가는 존재들의 파편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존재를 증명하려는 고독한 파수기였다.

"지윤은... 그녀는 공포 속에서도 나를 보았다. 그녀는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였다."

그는 억지로 문장을 밀어 넣었다. 그가 기록하는 방식은 사실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기록지에 새겨 넣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자신이 아직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의례였다. 그가 펜을 놓는 순간, 그 역시 이 비에 젖어 이름 없는 시체가 될 것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전장의 한쪽에서 비명과 섞인 파열음이 들려왔다. 자아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이안은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곳에는 강민이 있었다. 혹은, 한때 강민이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강민은 이제 전사의 용맹함 대신, 자아를 잃어가는 자의 기괴한 활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성흔이 부여한 생명력에 휘둘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의 궤적은 아름다웠으나, 그 끝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이안은 가슴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강민이 그토록 원했던 '영웅적 서사'는 이제 성흔의 비가 빚어낸 기괴한 잔상으로 변해 있었다.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옮겼다.

'강민은 오늘, 자신의 이름을 잃어가는 공포 앞에서도 가장 용감한 영웅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아직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글자는 빗물에 젖어 번졌지만, 이안은 그 문장이 지워지기 전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지기를 기도했다.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들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존재의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결은 그 모든 과정을 무미건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 비극적인 장례식의 관찰자였다.

"기록해라, 기록병. 네가 쓴 그 문장들이 이 비를 이겨낼 수 있다는 착각이, 너를 얼마나 더 처참하게 무너뜨릴지 지켜보겠다."

한결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차갑게 흩어졌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윤의 차가운 손을 잡은 채, 수첩에 마지막 한 문장을 새기려 애썼다. 빗소리는 이제 비명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아우성으로 변해 있었다.

이안은 젖은 수첩을 가슴에 밀착시킨 채, 짐승처럼 울부짖는 괴물들의 파상공세를 견뎌냈다. 그의 시야는 빗줄기와 튀어 오르는 혈흔, 그리고 성흔의 비가 빚어낸 기괴한 초록색 덩굴들로 인해 흐릿하게 일렁였다. 그때, 전장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며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적의 공격이 멈췄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전장의 흐름을 끊어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결이 서 있었다. 그는 방금까지 짐승처럼 날뛰던 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배처럼 흔들림 없이 이안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검은 갑옷은 은빛 비를 머금어 더욱 무겁고도 처참한 빛을 발했고, 그의 눈은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지켜보며 비탄에 잠긴 관찰자의 눈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기록병."

한결의 목소리는 빗줄기를 가르고 이안의 귓가에 꽂혔다. 그는 이안의 손에 들린 젖은 수첩과, 그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그 보잘것없는 종이 뭉치를 가리켰다.

"네가 쓰는 그 글자들은 이제 이 비를 이겨낼 수 없다. 봐라, 네 동료들의 눈동자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들은 이미 이름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성흔이 부여한 생명력에 휘둘리는 육신이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들의 이름을 적으며 자신을 속이고 있나?"

이안은 대답 대신 수첩을 더욱 꽉 쥐었다. 손가락 끝이 저려왔지만,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분명했다.

"속이는 것이 아니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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