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하늘이 쏟아내는 은빛 저주

재가 된 성좌의 노래 · 약 7분

은빛 비는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그것은 물리적인 무게를 가진 액체라기보다는, 공기 중에 부유하는 미세한 파편이자 정신을 갉아먹는 가시였다. 이안은 젖어 든 수첩을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차가운 습기가 가슴팍에 닿았지만, 그보다 더 시린 것은 바로 곁에 앉은 강민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공허였다. 강민은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은 이제 어디서부터가 진짜이고 어디부터가 성흔의 침식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굴곡을 그리며 휘어졌다.

“이안, 너 말이야. 나중에 내가 진짜 멋진 짓을 하면 꼭 기록해줘야 한다? 내 이름이 이 땅에 새겨진 영웅으로 남도록 말이야.”

강민의 목소리는 젖은 흙바닥을 굴러가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이안은 대답 대신 펜을 다시 쥐었다. 손가락 끝이 저려왔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는 이 지옥 같은 전선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의지가 머무르는 성소였다. 그는 강민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성흔의 비가 닿는 곳마다 피부 위로 돋아나는 기괴한 초록색 덩굴은 생명의 찬가라기보다 사신의 장식에 가까웠다. 그것들은 혈관을 타고 흐르며 육체를 비대하게 키워냈으나, 그 대가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기억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기록할게. 네가 얼마나 용감한 놈인지, 그리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기억하는 한, 너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

이안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단호했다. 그는 수첩 위에 강민의 이름과 그가 보여준 그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를 문장으로 옮겨 적었다. 하지만 종이는 비에 젖어 잉크를 번지게 만들었고, 방금 쓴 글자는 마치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 같은 위태로운 흔색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마치 성흔의 비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비웃는 것 같았다.

전선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배치된 병사들은 이제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기보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생명체로 대하며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성흔의 비는 그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했다. 굶주림도, 피로도, 부상으로 인한 쇼크도 그들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그들은 죽지 않는 육체를 얻었으나, 그 육신을 지탱하는 ‘나’라는 자아를 잃어갔다.

“어이, 이안! 저기 봐, 저놈들 좀 봐!”

강민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전방을 가리켰다. 이안의 시선이 따라간 곳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기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인간이었을 병사들이었으나, 이제는 성흔의 비에 완전히 침식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괴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본능에 의한 움직임으로 전방을 향해 돌진했다.

“전투 준비! 방어선 유지해!”

이안의 외침이 빗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병사들은 총을 쏘았고, 화염이 은빛 비 사이로 솟구쳤다. 하지만 적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성흔이 부여한 기괴한 광채만이 번뜩일 뿐이었다.

전투는 처참했다. 그것은 전략적인 교전이라기보다, 자아를 잃어가는 자들과 그들을 저지하려는 자들 사이의 처절한 사투였다. 이안은 총구를 고쳐 잡으며 앞을 가로막는 괴물들의 파상공세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동료를 알아보지 못했고, 적군조차 이제는 인간의 지휘 체계 아래에 있지 않았다. 승리라는 개념은 이미 희박해졌다. 이 전선에서 목표는 영토 점령이 아니라, 단 한 순간이라도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유지하며 살아남는 것이었다.

강민은 그 혼란 속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적들을 밀어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혹은 가장 인간다운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이 포효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움직임은 화려했고,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이 비극적인 전장 속에서 유일하게 생동감 넘치는 빛이었다.

“이안! 나를 봐! 아직은... 아직은 나야!”

강민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이안은 그 외침을 듣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강민의 눈동자 속에서 번뜩이는 그 기묘한 광채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아를 잠식하는 성흔의 저주이면서도, 동시에 그가 가진 마지막 생명력의 잔해였다.

이안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비명과 섞여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는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민이 아직 인간으로 남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쏘았다. 빗발이 쏟아지는 전장 속에서, 이안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위치와 행동, 그리고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기록할 수 없는 순간들은 기억 속에라도 새겨야 했다.

전투가 끝난 뒤, 전선은 다시 정적과 빗소리로 채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로운 정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침묵이자, 사라져가는 이들의 신음이었다. 이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은 덜덜 떨렸고, 수첩은 이제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젖어 있었다.

그는 옆에 쓰러진 강민을 바라보았다. 강민은 아직 살아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공허해져 있었다. 이안은 다시 펜을 쥐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는 이제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그는 기록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강민이 보인 그 처절한 투쟁을. 그가 잃어가는 자아의 파편을 하나라도 더 붙잡아 두기 위해, 그는 젖은 종이 위에 다시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하늘이 쏟아내는 은빛 저주는 마치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워버리려는 듯이 잔인하게 쏟아졌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에 매달린 낡은 은색 문장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것은 그가 아직도 이곳에 존재한다는, 그리고 그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이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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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비어있는 페이지 위에 오늘 본 것을 적어 내려갔다. 빗물에 번진 글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기록했다. 강민이 보여준 그 용맹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아직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러나 그가 글자를 채워 넣는 속도보다, 성흔의 비가 그들의 기억을 마모시키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는 이제 단순히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존재들의 마지막을 지키는 파수기가 되어야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은빛 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것은 축복의 탈을 쓴 저주였고, 생명의 탈을 쓴 멸망이었다. 이안은 다시 펜을 쥐었다. 그의 손등에는 차가운 빗방울이 맺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이 지옥의 유일한 증언자가 되어, 사라져가는 이들의 이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빗소리가 다시 한번 거세게 대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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