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뒤엉킨 시간의 실타래
은우가 내 어깨를 감싸 쥐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에도, 내 시선은 자꾸만 작업대 위의 시계로 미끄러졌다. 금이 간 유리 덮개 너머로 보이는 말라붙은 푸른 꽃잎은, 마치 죽어가는 생명의 마지막 숨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방금 전의 그 거대한 파동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서점은 다시금 기분 나쁜 정적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지안아, 일단 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네 손이... 너무 차가워."
은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 손을 감싸 쥐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체온이 전달되었지만, 내 안의 냉기는 피부 표면이 아닌 골수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능력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아주 미세하게 흐릿해지더니, 사물의 색채가 한 단계씩 채도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타인의 기억을 만질 때마다, 나의 세계가 조금씩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나는 은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뿌리치고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이제... 시작인 것 같아. 문이 열렸어."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뒤로한 채, 창밖의 안개를 응시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둑이 터진 강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저 사람...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물었다. 내 목소리는 마치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먹먹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안아.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뭔지 알아? 네가 저 남자의 기억을 건드린 순간부터, 너와 저 남자의 세계는 연결된 거야. 저 남자의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네가 가진 그... 그 기이한 힘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
은우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했다. 나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태엽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남자의 눈빛에도 생경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멍한 시선이 아니라, 무언가에 홀린 듯한 절박한 눈빛으로 허공을 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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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의 표정은 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마치 아주 오래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혹은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을 찾아 헤매는 유랑자처럼 괴로워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서점 안의 공기는 기묘한 향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꽃향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서늘하고, 바다 향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달콤한, 형용할 수 없는 향이었다.
나는 그 향기가 어디서 오는지 추적했다. 그것은 시계에서 배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고, 남자의 숨결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이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이 향기...'
나는 기억의 저편,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며 품어온 유품을 떠올렸다. 부모님을 잃었던 그 사고의 현장에서, 내가 유일하게 손에 쥐고 있었던 작은 나무 조각. 그것은 아주 작은 꽃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서늘하고도 달콤한 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옷 안쪽,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간직한 그 나무 조각을 꺼냈다.
그것은 작고 낡은, 꽃 모양의 부적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코끝을 스치는 이 공기 속의 향기와, 내 손바닥 위 나무 조각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가 소름 끼칠 정도로 일치하고 있었다.
해안가 바위틈에서 보았던 그 푸른 꽃들. 그 꽃들이 내뿜던 그 서늘한 향기. 그리고 지금 남자의 기억이 흐르며 서점 안을 가득 채운 이 향기까지.
"설마..."
나는 숨을 멈췄다. 만약 이 향기가 이 남자의 기억이 가진 고유한 지문이라면. 그리고 그 지문이 내가 가진 유품의 향기와 같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이 기이한 능력과, 이 남자가 잃어버린 그 지독한 기억이,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의 실로 꿰어져 있었다는 뜻이었다. 남자의 기억 속에 깃든 푸른 꽃의 향기는, 내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게 만든 그 슬픈 기억의 파편과 닮아 있었다.
"지안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안개를 걷어낸 듯 맑아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 보았던 기억의 잔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당신이...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걸 압니다. 당신의 눈이, 제가 잊으려 했던 그 풍경을 읽어내고 있는 것 같군요."
그의 말은 마치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내뿜는 향기가 점점 더 짙어질수록, 내 손안의 나무 조각은 차갑게 식어갔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가 다시 물었다. 그의 눈빛은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자의, 처절하고도 뜨거운 갈망을 담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내 손바닥 위의 작은 꽃을 꽉 쥐었다. 나의 능력이 깎여나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이 향기가 선명해질수록, 내가 지켜온 고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당신이... 스스로를 가둔 그 문을, 제가 열어버렸습니다."
나는 겨우 입술을 떼어 말했다. 그것은 고백이자, 예고였다.
남자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그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한 듯,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깊은 슬픔과 경악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내 손에 쥐어진 작은 나무 조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서점의 창밖으로 거대한 파도가 해안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우리는 서로의 향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마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