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제12장: 기억의 무게

기억을 수선하는 파도 소리 · 약 6분

"당신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목소리는 물기 어린 안개처럼 흩어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나의 눈앞으로, 열린 시계의 틈을 타고 기억의 해일이 다시금 밀려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아까는 파편들이 흩날리는 폭풍이었다면, 지금은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내 의식을 통째로 삼키려 들었다.

도윤의 눈동자가 떨리며 나의 시선과 부딪혔다.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시계 속에서 푸른 빛의 소용돌이가 거칠게 치솟았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잔상이 아니었다. 빛의 줄기들이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뻗어 나와 나와 그의 손끝을, 그리고 우리의 심장부를 하나로 엮어버렸다.

"아...!"

그와 동시에 세계가 뒤집혔다. 서점의 천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수만 개의 푸른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환상적인 밤의 바다가 펼쳐졌다. 도윤의 기억이 나의 의식 안으로, 마치 혈관 속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피처럼 들이쳤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보았다. 어린 시절,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나의 부모님이 남긴 유품, 그 작은 나무 조각을 품에 안고 울던 한 소녀를. 그리고 그 소녀의 곁에서, 겁에 질린 눈으로 그 나무 조각을 함께 지켜주던 한 소년을.

"지안아..."

기억 속의 소년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지금의 도윤이 아닌, 아주 오래전 나의 세계를 지탱하던 온기였다.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든 나무 인형이 부서질까 봐, 자신의 기억이 닳아 없어질까 봐, 온 힘을 다해 그 조각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순간, 나의 기억과 그의 기억이 충돌하며 찬란한 빛의 잔상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질 때 발생하는, 눈이 멀 정도의 눈부신 섬광이었다. 빛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보석처럼 부서지며 우리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우리가... 우리가 함께했던..."

도윤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지키고자 했던 그 푸른 꽃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도려내어 시계 속에 가둔 이유는, 그 기억이 너무나 소중해서가 아니었다. 그 기억이 다시 살아나면, 그 기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푸른 꽃의 향기가 퍼져나갈수록, 내가 가진 능력의 빛이 바래가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타인의 기억을 수선할 때마다 나의 세계가 무채색으로 변해간다는 그 잔인한 법칙을, 그는 자신의 기억을 봉인함으로써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망가뜨린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결단이었다. 내가 기억의 수선사로서 고립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가 가진 가장 찬란한 기억을 스스로 거세하여 차가운 금속 속에 가두어버린 것이었다.

"왜... 왜 그런 선택을 했습니까. 왜 혼자서 그 무게를 다 짊어지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눈물은 뜨거웠고, 내 시야를 가리는 안개는 비극적인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도윤 역시 무너져 내리듯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서도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의 차가운 안개를 적시고 있었다.

"당신이... 당신이 색을 잃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세계가 무채색이 되는 것을, 내가 그 원인이 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젖은 모래알처럼 거칠고 아팠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마주 보았다. 나는 타인의 기억을 수선하며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그는 나의 고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봉인했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결국 서로를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밀어 넣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도려냈다.

기억의 합쳐짐이 정점에 달하자, 우리 주변을 감싸던 빛의 잔상이 더욱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마치 두 영혼이 하나로 섞이며 내는 마지막 비명 같았다. 빛은 너무나 강렬하여 눈을 뜨고 있을 수조차 없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서점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방금 전의 그 눈부신 빛의 폭풍은 간데없고, 오직 차갑게 식은 공기만이 우리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색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주 희미하게, 아주 미세하게, 세상의 색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다만, 그 색들이 예전처럼 선명하지 않고 조금은 흐릿해진 느낌이었다.

"지안 씨..."

도윤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깊고 무거운 슬픔이 가라앉은, 명징한 목소리였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자신이 지워버렸던 그 모든 순간을 온전히 되찾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고독한 수선사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잊고 있었던, 혹은 그가 지키려 했던 나의 조각을 품고 있었다.

"이제... 다 보셨나요?"

그가 물었다. 그 질문은, 이제 자신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음을, 그리고 그 대가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아까의 냉기와는 다른, 살아있는 사람의 박동이 느껴졌다.

"모두... 다 보았습니다. 당신이 숨겨두었던, 그 아픈 진실까지도요."

창밖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안개가 걷히는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찬란한 아침 햇살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힘이 빠져나간 뒤에 찾아오는, 서늘하고 쓸쓸한 현실의 풍경이었다.

서점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마법이 풀려나가는 듯한, 혹은 존재의 근간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듯한 기분 나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나는 직감했다. 우리가 마주한 이 진실의 무게가, 이제 우리가 알던 이 기이한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목차

P 프롤로그파도 소리 가득한 서가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수선하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1 제1장: 파도의 숨결이 머무는 곳안개 자욱한 서점, 낡은 열쇠가 깨운 기이한 떨림. 2 제2장: 낯선 방문객의 파편멈춰버린 회중시계에 깃든 서늘한 기억을 마주하다. 3 제3장: 읽어낼 수 없는 문장들시계 속에 봉인된 푸른 기억의 파편을 마주하다. 4 제4장: 잊힌 계절의 흔적해안가에 피어난 푸른 꽃과 시계가 품은 서늘한 기억의 조각. 5 제5장: 겹쳐지는 그림자시계 속에 깃든 남자의 기억을 마주하며, 잊힌 조각들이 연결되는 기묘한 파동을 느낀다. 6 제6장: 봉인된 기억의 문턱의식 속 거대한 철문을 열 유일한 열쇠를 발견하다. 7 제7장: 안개 속의 재회금기된 기억의 문을 열려는 지안과 이를 막으려는 은우의 대립. 8 제8장: 차가운 진실의 조각시계 속에 봉인된 남자의 서늘한 기억이 깨어난다. 9 제9장: 뒤엉킨 시간의 실타래기이한 능력으로 마주한 남자의 기억과 낯익은 향기. 10 제10장: 침묵하는 바다의 경고기억을 수선하는 대가로 자신의 빛을 잃어가는 지안. 11 제11장: 열쇠가 여는 세계시계 속 열쇠로 연 기억의 문, 그 너머에 숨겨진 비극의 서막. 12 제12장: 기억의 무게시계 속에서 터져 나온 기억의 해일과 마주한 순간. 13 제13장: 흩어지는 환상기억이 돌아온 대가로 신비로운 감각이 사라져 간다. 14 제14장: 빛의 소멸기억의 빛이 사라진 자리, 무채색의 현실이 찾아왔다. 15 제15장: 무너지는 서가기억이 되살아난 순간, 신비로운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16 제16장: 마지막 수선사라져가는 감각을 쥐어짜 도윤의 부서진 기억을 수선하다. 17 제17장: 평범함의 무게사물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잃고 마주한 선명한 현실. 18 제18장: 파도 소리가 머무는 일상기억의 환상이 사라진 자리,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한 온기. E 에필로그안개가 걷힌 자리, 비로소 마주한 찬란한 현실의 빛.

읽기 설정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