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제17장: 평범함의 무게

기억을 수선하는 파도 소리 · 약 8분

도윤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질감이었다. 그것은 기억의 파편들이 빚어낸 거대하고 푸른 해일이 아니었다. 그저 살갗을 타고 스며드는, 작고 미미하며 아주 인간적인 열기였다. 그 미약한 온기가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생경하면서도 기이한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뺨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은 차갑고 거칠었으며, 그 너머로 맥박이 뛰는 미세한 진동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피부가 품은 수만 가지의 시간과 그 속에 숨겨진 슬픔의 궤적을 읽어내려 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사실만이 물리적인 감각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지안 씨..."

도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안개 속을 헤매는 환청이 아니었다. 공기의 떨림을 타고 내 귓가에 명확하게 내려앉는, 무게감 있는 음성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머물던 그 지독히도 푸르던 광채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붉게 충혈된 눈과 젖은 눈망울이 남았다. 그 모습은 비극적인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이를 잃을 뻔한 한 남자의 절박한 얼굴에 더 가까웠다.

"이제... 정말로 다 끝난 건가요?"

그가 물었다. 그 질문은 내가 가진 능력이 사라진 것에 대한 확인이자, 우리가 마주한 이 적막한 현실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네. 다 끝났어요."

나는 대답했다. 내 목소리는 예전처럼 공명하지 않았다. 물건의 잔상을 쫓으며 몽환적으로 울리던 소리가 아니라, 목구멍을 통과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아주 평범하고 무딘 소리였다.

✦ ✦ ✦

서점 안의 공기는 이제 더 이상 신비로운 향기를 머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휘감았던 푸른 꽃의 잔상은, 마지막 순간 내 의식의 끝자락에서 아주 희미한 빛의 입자가 되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환상이 현실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워버린 듯한 흔적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작업대 위에 놓인 은색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그 찬란한 폭풍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시계는 그저 낡고 녹슨 금속 덩어리로 돌아가 있었다. 시계의 태엽이 멈춘 것은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기억의 생명력이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문득, 시계의 틈새로 아주 작게 남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빛의 잔상이 아니라, 아주 작게 말라붙은 푸른 꽃잎의 파편이었다. 아까의 그 거대한 푸른 빛이 모두 사라진 뒤, 시계의 톱니바퀴 사이에 아주 미세하게 끼어 있는 그 조각은 마치 죽어가는 생명의 마지막 숨결처럼 보였다. 그것은 내가 수선해온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가장 아프고 날카로웠던, 도윤이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선택했던 그 비극의 잔해였다.

나는 그 꽃잎을 다시 읽어낼 수 없었다. 그것이 어떤 슬픔을 품고 있는지, 왜 그토록 차갑게 식어갔는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말라비틀어진 식물의 흔적일 뿐이었다. 그 무력함이, 그 무심함이 나를 이상하게 위로했다.

"지안아, 괜찮니? 정말 괜찮은 거야?"

은우가 다가와 내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손길은 예전처럼 따뜻했지만, 그 따스함이 내 영혼을 울리는 특별한 파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득 서글퍼졌다. 하지만 그 서글픔조차도, 이제는 내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드는 아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통증으로 느껴졌다.

"응, 괜찮아. 은우야. 그냥... 조금 낯설 뿐이야."

나는 미소 지었다. 예전의 미소는 안개처럼 흐릿하고 신비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의 미소는 입가 근육이 움직여 만들어내는 아주 단순한 표정이었다.

"세상이 너무... 무거워졌어. 모든 게 너무 선명하고, 너무 딱딱해."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물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을 때는 세상이 마치 흐릿한 수채화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날카로운 선으로 그어진 세밀화처럼 다가왔다. 모든 사물의 경계가 명확해졌고, 그 경계 사이에는 더 이상 숨겨진 이야기가 없었다.

✦ ✦ ✦

백유진은 서점의 문가에 서서, 이 기묘한 침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자신이 예상했던 파국이 실현된 것에 대한 기묘한 만족감과, 동시에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노회한 관찰자의 쓸쓸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결국, 너는 평범한 길을 선택했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서점의 적막을 깨뜨렸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작업대 위에 놓인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 시계는 이제 아무런 가치도 없어. 네가 읽어낼 수 있는 것도, 내가 취할 수 있는 것도 없지. 기억의 힘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오직 시간의 흐름만이 남을 뿐이니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내가 가진 '수선'의 능력은 기억의 간극을 메우는 마법이었으나, 그 간극이 완전히 메워지거나 혹은 힘이 다해 사라지면 사물은 그저 사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녀가 탐하던 그 희귀한 기억의 조각들도, 이제는 그저 낡은 유품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가봐야겠어. 이곳의 공기가 이제는 너무나 지루하거든."

백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점을 나섰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질수록, 서점 안의 고요함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오직 낡은 책들이 내뿜는 건조한 종이 냄새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파도 소리만이 남았다.

도윤은 여전히 내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내 손등을 스치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았지만, 그 기억을 완성하기 위해 내가 지불한 대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지안 씨, 제가... 제가 다 망쳐버렸습니다. 당신의 세계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내가 준 온기가 사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요, 도윤 씨. 망친 게 아니에요."

나는 그의 손을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예전처럼 그의 영혼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손이 얼마나 차갑고 떨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그저,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나는... 이제 당신을 한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 있게 된 거고요."

내 말에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여전히 고여 있었으나, 그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과 함께,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빛의 파동이 아닌,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아주 작고 소박한 온기였다.

창밖의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서점 안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비로운 푸른 빛이 아니라, 해가 지기 직전의 나른하고 노란 빛이었다. 그 빛은 먼지 쌓인 책장 위를 지나, 우리 두 사람의 발치에 머물렀다.

나는 이제 안개 너머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사물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한 세계가, 어쩌면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진짜 삶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점의 문을 열고 나가면, 이제는 기억의 잔상이 없는, 오직 발걸음 소리만이 들리는 현실의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서툴고 고단하게 서로를 알아가게 될까.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차갑고, 명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목차

P 프롤로그파도 소리 가득한 서가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수선하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1 제1장: 파도의 숨결이 머무는 곳안개 자욱한 서점, 낡은 열쇠가 깨운 기이한 떨림. 2 제2장: 낯선 방문객의 파편멈춰버린 회중시계에 깃든 서늘한 기억을 마주하다. 3 제3장: 읽어낼 수 없는 문장들시계 속에 봉인된 푸른 기억의 파편을 마주하다. 4 제4장: 잊힌 계절의 흔적해안가에 피어난 푸른 꽃과 시계가 품은 서늘한 기억의 조각. 5 제5장: 겹쳐지는 그림자시계 속에 깃든 남자의 기억을 마주하며, 잊힌 조각들이 연결되는 기묘한 파동을 느낀다. 6 제6장: 봉인된 기억의 문턱의식 속 거대한 철문을 열 유일한 열쇠를 발견하다. 7 제7장: 안개 속의 재회금기된 기억의 문을 열려는 지안과 이를 막으려는 은우의 대립. 8 제8장: 차가운 진실의 조각시계 속에 봉인된 남자의 서늘한 기억이 깨어난다. 9 제9장: 뒤엉킨 시간의 실타래기이한 능력으로 마주한 남자의 기억과 낯익은 향기. 10 제10장: 침묵하는 바다의 경고기억을 수선하는 대가로 자신의 빛을 잃어가는 지안. 11 제11장: 열쇠가 여는 세계시계 속 열쇠로 연 기억의 문, 그 너머에 숨겨진 비극의 서막. 12 제12장: 기억의 무게시계 속에서 터져 나온 기억의 해일과 마주한 순간. 13 제13장: 흩어지는 환상기억이 돌아온 대가로 신비로운 감각이 사라져 간다. 14 제14장: 빛의 소멸기억의 빛이 사라진 자리, 무채색의 현실이 찾아왔다. 15 제15장: 무너지는 서가기억이 되살아난 순간, 신비로운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16 제16장: 마지막 수선사라져가는 감각을 쥐어짜 도윤의 부서진 기억을 수선하다. 17 제17장: 평범함의 무게사물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잃고 마주한 선명한 현실. 18 제18장: 파도 소리가 머무는 일상기억의 환상이 사라진 자리,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한 온기. E 에필로그안개가 걷힌 자리, 비로소 마주한 찬란한 현실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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