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흩어지는 환상
맞잡은 손을 타고 흐르던 그 지독한 열기가, 마치 밀물이 빠져나간 뒤의 갯벌처럼 급격히 식어갔다. 도윤의 눈동자 속에 일렁이던 찬란한 기억의 파동이 잦아들수록, 서점 안을 가득 채웠던 푸른 안개도 그 농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집어삼킬 듯 거세게 몰아치던 그 푸른 꽃의 향기는, 이제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듯 위태로운 잔향으로 남았다. 그것은 내가 평생을 품어온 나무 조각의 향기와 닮아 있었으나, 이제는 그 생명력을 다한 듯 건조하고 무미건조한 공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안아, 네 손이... 네 손이 예전 같지 않아."
은우의 목소리가 떨리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시계의 열린 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던 푸른 빛의 실타래들이, 이제는 마치 썰물에 밀려가는 모래알처럼 허망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사물이 가진 기억의 결이 더 이상 읽히지 않았다.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시계는 이제 그저 차갑고 딱딱한 금속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 안에 깃들어 있던 뜨거운 생명력, 누군가의 삶이 응축되어 있던 그 기이한 박동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억이... 돌아왔어요. 정말로, 다 돌아왔어요."
도윤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이제 더 이상 환상 속의 푸른 꽃을 쫓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서늘하고도 명징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가 되찾은 것은 찬란한 과거였으나, 그 대가로 우리를 감싸고 있던 신비로운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내 안의 감각을 더듬었다. 타인의 물건을 만질 때마다 느껴지던 그 미세한 떨림, 영혼의 무늬를 읽어내던 그 예민한 촉수가 마치 마른 가죽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던 세상의 모든 숨결이, 일순간에 거대한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이건... 꿈이 아니야. 하지만 꿈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
내가 내뱉은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서점 벽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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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진의 시선은 여전히 냉혹했다. 그녀는 서점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사라져가는 기이한 기운의 궤적을 쫓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나 경외감 따위는 없었다. 오직 자신이 관찰하던 현상이 어떻게 소멸해가는지에 대한 지독한 탐구심만이 서려 있었다.
"보렴, 지안아. 네가 열어젖힌 문이 결국 무엇을 가져왔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안개 섞인 공기를 가르고 날카롭게 날아와 박혔다.
"기억은 수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한 번 둑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 버리지. 네가 그 남자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올린 순간, 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둔 방벽이 무너졌고, 그 결과로 이 공간을 지탱하던 모든 마법 같은 균형이 깨져버린 거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서점 안을 감돌던 푸른 빛의 입자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공기는 점점 더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휘감았던 그 신비로운 향기조차, 이제는 희미한 흙냄새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대가는, 네가 가진 그 특별함의 상실이야. 이제 이 시계는 그저 낡은 물건일 뿐이고, 너는 그저 물건을 만지는 평범한 서점 주인이 되겠지."
그녀의 말은 저주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예언처럼 다가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만져보았다. 예전처럼 가슴을 울리는 진동도, 푸른 빛의 잔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무거운, 죽은 금속의 감촉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질 뿐이었다.
도윤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되찾은 기억의 무게가, 이 공간의 신비로움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은 듯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머물던 그 뜨거운 생명력이, 서점의 기운이 사라짐과 동시에 조금씩 채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안 씨, 당신의 눈이..."
도윤이 떨리는 손을 뻗어 내 뺨 근처에 가져다 댔다. 그의 손끝이 내 피부에 닿는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의 손길은 예전처럼 온기를 품은 생명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차가운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무감각한 접촉이었다. 내가 그동안 느꼈던 모든 감각의 결이, 마치 썰물에 휩쓸려 나가는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내 손끝에 닿는 도윤의 온기, 은우의 다급한 숨소리, 서점 안을 채우던 신비로운 향기까지. 모든 것이 지독히 현실적인, 그래서 더 서글픈 무채색의 세계로 변해가고 있었다.
서점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안개는 이제 더 이상 신비로운 장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축축하고 불쾌한, 지상의 날씨일 뿐이었다. 내가 평생을 지켜온 이 고립된 세계의 마법이, 마침내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