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파도는 결코 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들의 흔적을 지우며, 오직 부서진 포말만을 남겨둘 뿐이다. 이곳, 안개가 몸을 낮추는 동해의 작은 포구 마을에서는 시간조차 파도의 리듬에 맞춰 느릿하게 흐른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혹은 누군가를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흘린 조각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물건의 모서리에, 혹은 낡은 옷감의 결 사이에 아주 미세한 잔상으로 남아 떠돈다.
나는 그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붙잡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한다.
서점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밀려드는 것은 눅눅한 바다의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향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파도 서가'라 부르지만, 사실 이곳은 책을 읽는 곳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수선하는 작업실에 가깝다. 손끝에 닿는 물건마다 저마다의 비명이 들려온다. 누군가의 뜨거웠던 환희, 혹은 차갑게 식어버린 이별의 슬픔이 손가락을 타고 심장 근처로 파고든다. 그 무게를 견디는 일은 때로 숨이 가쁠 만큼 고단하지만, 나는 이 고립된 평온을 사랑한다. 타인의 기억을 만지는 대가로 나는 나의 세계를 좁혀가고 있었다.
"지안아, 또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는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은우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는 늘 내가 만든 이 고요한 성벽을 흔들어 놓곤 한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창밖의 자욱한 안개를 바라본다. 안개는 비밀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가리개다.
그날은 유독 안개가 짙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경계가 흐릿해진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파도를 타고 밀려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뒤흔들,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그림자가 이 안개를 뚫고 서점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불길하고도 애틋한 예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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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나의 세계는 이토록 고요하고도 완벽한 고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