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프롤로그

기억을 수선하는 파도 소리 · 약 2분

파도는 결코 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들의 흔적을 지우며, 오직 부서진 포말만을 남겨둘 뿐이다. 이곳, 안개가 몸을 낮추는 동해의 작은 포구 마을에서는 시간조차 파도의 리듬에 맞춰 느릿하게 흐른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혹은 누군가를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흘린 조각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물건의 모서리에, 혹은 낡은 옷감의 결 사이에 아주 미세한 잔상으로 남아 떠돈다.

나는 그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붙잡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한다.

서점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밀려드는 것은 눅눅한 바다의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향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파도 서가'라 부르지만, 사실 이곳은 책을 읽는 곳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수선하는 작업실에 가깝다. 손끝에 닿는 물건마다 저마다의 비명이 들려온다. 누군가의 뜨거웠던 환희, 혹은 차갑게 식어버린 이별의 슬픔이 손가락을 타고 심장 근처로 파고든다. 그 무게를 견디는 일은 때로 숨이 가쁠 만큼 고단하지만, 나는 이 고립된 평온을 사랑한다. 타인의 기억을 만지는 대가로 나는 나의 세계를 좁혀가고 있었다.

"지안아, 또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는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은우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는 늘 내가 만든 이 고요한 성벽을 흔들어 놓곤 한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창밖의 자욱한 안개를 바라본다. 안개는 비밀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가리개다.

그날은 유독 안개가 짙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경계가 흐릿해진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파도를 타고 밀려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뒤흔들,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그림자가 이 안개를 뚫고 서점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불길하고도 애틋한 예감 말이다.

✦ ✦ ✦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나의 세계는 이토록 고요하고도 완벽한 고립이었다.

목차

P 프롤로그파도 소리 가득한 서가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수선하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1 제1장: 파도의 숨결이 머무는 곳안개 자욱한 서점, 낡은 열쇠가 깨운 기이한 떨림. 2 제2장: 낯선 방문객의 파편멈춰버린 회중시계에 깃든 서늘한 기억을 마주하다. 3 제3장: 읽어낼 수 없는 문장들시계 속에 봉인된 푸른 기억의 파편을 마주하다. 4 제4장: 잊힌 계절의 흔적해안가에 피어난 푸른 꽃과 시계가 품은 서늘한 기억의 조각. 5 제5장: 겹쳐지는 그림자시계 속에 깃든 남자의 기억을 마주하며, 잊힌 조각들이 연결되는 기묘한 파동을 느낀다. 6 제6장: 봉인된 기억의 문턱의식 속 거대한 철문을 열 유일한 열쇠를 발견하다. 7 제7장: 안개 속의 재회금기된 기억의 문을 열려는 지안과 이를 막으려는 은우의 대립. 8 제8장: 차가운 진실의 조각시계 속에 봉인된 남자의 서늘한 기억이 깨어난다. 9 제9장: 뒤엉킨 시간의 실타래기이한 능력으로 마주한 남자의 기억과 낯익은 향기. 10 제10장: 침묵하는 바다의 경고기억을 수선하는 대가로 자신의 빛을 잃어가는 지안. 11 제11장: 열쇠가 여는 세계시계 속 열쇠로 연 기억의 문, 그 너머에 숨겨진 비극의 서막. 12 제12장: 기억의 무게시계 속에서 터져 나온 기억의 해일과 마주한 순간. 13 제13장: 흩어지는 환상기억이 돌아온 대가로 신비로운 감각이 사라져 간다. 14 제14장: 빛의 소멸기억의 빛이 사라진 자리, 무채색의 현실이 찾아왔다. 15 제15장: 무너지는 서가기억이 되살아난 순간, 신비로운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16 제16장: 마지막 수선사라져가는 감각을 쥐어짜 도윤의 부서진 기억을 수선하다. 17 제17장: 평범함의 무게사물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잃고 마주한 선명한 현실. 18 제18장: 파도 소리가 머무는 일상기억의 환상이 사라진 자리,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한 온기. E 에필로그안개가 걷힌 자리, 비로소 마주한 찬란한 현실의 빛.

읽기 설정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