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제9장: 무채색의 유영

무채색의 유영 · 약 5분

서버실의 차가운 금속 바닥을 타고 흐르는 것은 냉각수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식이 흘러나오는 혈액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준오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는 감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시야는 뿌연 안개 속에 잠긴 듯 흐릿했고, 머릿속은 거대한 백지 위에 잉크를 쏟아부은 것처럼 아무런 문장도, 단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뜨거운 분노, 동생의 이름, 그리고 저 거대한 백색의 탑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마저도 차가운 빗줄기에 씻겨 내려간 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는지, 왜 이 거대한 빌딩의 심장부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손끝에 닿는 감각은 생경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 몸이 누구의 것인지조차 증명할 수 없는 백지상태의 유령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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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거리는 아수라장이었다. 거대한 스크린과 개인의 단말기, 도시를 가로지르는 모든 빛의 통로를 통해 '레테'의 추악한 진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인간의 자아를 해체하고, 죄책감을 거세하여 통제 가능한 부품으로 만드는 제조 공정의 기록들. 붉은 빛이 일렁이는 그 잔인한 데이터들이 도시의 네온사인보다 더 선명하게 시민들의 눈을 때렸다.

사람들은 경악하거나, 혹은 공포에 질려 숨을 죽였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누려온 평온이 누군가의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가짜였다는 사실에 절규했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운 진실의 파편들 사이로, 준오는 비틀거리며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낡은 수첩과 차가운 금속 펜던트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토록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바닥을 파고드는 금속의 감촉만이 유일한 실존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는 젖은 아스팔트 위를 걸었다. 발걸음은 목적지 없이 유영하는 조각배처럼 위태로웠다.

문득 왼쪽 손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멈춰 서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붉게 달아오른 흉터가 있었다. 그 흉터는 그가 과거에 저지른 어떤 사건, 즉 스스로 약물을 복용하며 기억을 도려내야만 했던 그 참혹한 선택의 낙인이었다. 그가 지우려 했던 것은 동생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한 자아였다는 사실이, 기억은 사라졌음에도 육체의 통증만은 잊지 못한 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L-0-1-1-2].

머릿속을 스치는 이 숫자의 잔상이 무엇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자아를 해체하는 임계값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버렸던 삶의 좌표였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었다. 숫자는 그저 의미를 상실한 기호가 되어 뇌리 속을 부유할 뿐이었다.

✦ ✦ ✦

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의 모든 색채를 지워버리려는 듯 더욱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준오는 젖은 옷을 여미며 길가에 멈춰 선 채, 멀리 보이는 거대한 백색의 탑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이 무엇을 파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거대한 빛의 탑이 이제는 이전처럼 신성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저곳이 인간의 영혼을 도살하는 거대한 무덤이었다는 기분 나쁜 직감만이 차가운 안개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주머니 속의 펜던트를 다시 한번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모래알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삶의 파편들이었다. 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것은 허무한 빗물뿐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유능한 형사였던 기억도, 동생을 향한 애틋한 마음도, 거대 기업을 향해 던졌던 서슬 퍼런 분노도 모두 저 붉은 액체 속으로 녹아 없어져 버렸다. 그는 그저 이름 없는 수집가였거나, 혹은 이름조차 가질 수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채색의 도시 속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과 환호, 그리고 진실을 알린 데이터의 파동이 소용돌이치는 이 도시에서, 그는 오직 자신만의 정적을 품은 채 걷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이 차가운 빗속을 헤치며, 의미 없는 삶의 궤적을 따라 묵묵히 발을 내딛는 것뿐이었다.

그의 등 뒤로, 무너져 내리는 빛의 제국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그 그림자를 뒤로한 채, 안개 자욱한 도시의 심연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비로소 자유로워진, 그러나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는 고독한 유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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