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거울 속의 낯선 얼굴
쏟아지는 빗줄기는 도시의 채도를 더욱 낮춰버린 듯했다. 준오는 젖은 외투를 여미며 어둠 속을 달렸다. 차가운 물방-울이 뺨을 때릴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머릿속을 유영하는 의문들은 씻겨 내려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선명한 형체를 갖추며 그를 괴롭혔다. 그는 목적지 없는 질주를 멈추고, 근처의 낡은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뿌연 수증기와 빗줄기에 가려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의 펜던트를 꺼냈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손바닥을 자극했다. 아까 본 그 붉은 빛, 그리고 [L-0-1-1-2]라는 숫자.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준오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전화 부스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빗물에 젖어 창백해진 얼굴은 마치 낯선 타인의 그것처럼 이질적이었다.
"나는... 정말로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기억의 구멍은 단순히 잃어버린 파편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거대한 심연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정교하게 설계된 연극처럼 느껴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골동품을 수집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쌓아 올리는 이 모든 행위가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혹은 스스로 지워버린 가짜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 ✦ ✦
준오는 젖은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작업실이 아닌, 도시 외곽의 낡은 기록 보관소로 향했다. 그곳은 과거의 데이터와 파편화된 기록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곳이었다. 그는 예전 형사 시절,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드나들던 습관을 따라, 자신의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인적조차 끊긴 지 오래된, 습기 찬 지하 서고였다. 손전등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먼지 자욱한 공기를 가르며 길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 강준오라는 이름이 적힌 서류를 찾기 위해 수십 권의 장부를 뒤졌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은 죽은 자의 피부처럼 서늘하고 메말라 있었다.
한참을 헤매던 그의 손끝이 낡은 철제 상자 하나에 멈췄다. 그 상자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심장을 조여왔다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그가 수집하던 골동품과는 결이 다른, 지극히 사무적이고 차가운 서류들이 가득했다.
그는 무작정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한 장의 서류에서 손을 멈췄다. 그것은 의료 기록지였다.
[환자명: 강준오 / 연령: 32세 / 처방 약물: 레테(Lethe) - 고농도 기억 삭제용]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휘몰아쳤다. 눈앞의 글자들이 일렁이며 소용돌이쳤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레테'를 복용했다니. 자신이 스스로 이 약물을 처방받아 복용했다는 기록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특이 사항: 환자 본인의 강력한 요청에 의거함.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의 완전한 소거를 목적으로 함. 부작용에 대한 위험성을 고지하였으나, 환자는 현재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함.]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는 신음하듯 내뱉었다. 기억을 지우는 것은 타인에 의해 강제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절망케 했다. 그는 무엇을 지우고 싶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고통이, 어떤 진실이 그토록 끔찍했기에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단 말인가.
그는 서류를 뒤지다 더 깊은 기록을 발견했다. 그것은 단순한 의료 기록을 넘어, 그가 과거에 몸담았던 경찰 조직의 내부 보고서와 연결되어 있었다. 보고서에는 그가 맡았던 '미제 사건'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었다. 그 사건은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훨씬 더 거대한 음모를 품고 있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기록지 하단에 찍힌 작은 인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레테' 제약회사의 문장이었다. 서윤의 기업.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기억을 지우기 위해 찾아갔던 그곳이, 사실은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거대한 감옥의 입구였음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 흉터를 다시 만졌다. 이 흉터는 단순히 사고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물을 투여받은 자만이 남길 수 있는, 혹은 기억을 강제로 도려낸 자의 낙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의 수집가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자신이 지워버린 기억의 유해를 찾아 헤매는 유령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나를 죽였구나."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힘없이 바스러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노력할수록, 자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공백이 그를 비웃는 듯했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가 마주하는 것은 빛나는 진실이 아니라, 스스로가 파놓은 어둠의 구덩이였다.
그는 다시금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이제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약물의 공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를 지우기 위해 사용했던, 그 잔인한 시간의 좌표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어둠뿐이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 이제는 희미한 빛줄기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지워버린,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은 어떤 진실의 파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