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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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유영 · 약 3분

시간은 멈춘 듯 흐르고, 무영의 하늘은 여전히 빛바랜 회색이었다. '레테'의 거대한 백색 탑은 더 이상 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못했다. 모든 스크린을 통해 쏟아졌던 추악한 진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고, 한서윤이 구축하려던 완벽한 질서는 해체된 데이터의 잔해 속으로 침잠했다. 그녀는 무너진 제국의 잔해 위에서 한때 자신이 설계했던 '평온'이 얼마나 잔혹한 거세였는지를 증명하는 비명들을 마주하며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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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오는 어느 낡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 젖은 외투의 무게가 누구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이 지독한 통증만큼은 선명했다. 그것은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영혼의 마지막 박동이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때 묻은 낡은 수첩과 은색 펜던트였다. 그는 문득 이 물건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펜던트를 열자,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종이 조각이 들어 있었다. [L-0-1-1-2]. 그는 그 숫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숫자는 더 이상 차가운 공정의 암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를 파괴하며 지키고자 했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임계값이었다. 자아를 지우는 대신, 고통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으로 남겠다는 처절한 저항의 수치였다네.

그는 손목의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일렁이던 통증이 가라앉고, 그곳에는 서늘한 낙인만이 남았다. 이 흉터는 그가 과거에 마주했던 참혹한 진실, 즉 동생 민우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거대한 음모의 목격자로서 스스로를 처벌하기 위해 새겼던 형벌의 흔적이었다. 그는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기억을 도려냈지만, 육체는 끝내 그 죄를 잊지 않고 통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

그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가슴 속을 흐르는 이 뜨거운 무언가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지키려 했던 자였고, 진실을 위해 자신을 파괴한 자였으며, 끝내 동생의 이름을 가슴에 묻은 형이었다.

그는 펜던트를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금속의 감각이 비로소 살아있다는 실감을 주었다. 비록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비어버렸을지라도, 이 통증이 있는 한 그는 여전히 무채색의 세계를 유영하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안개가 걷히고 희미한 빛이 도시의 경계를 비추었다. 준오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발끝에 닿는 차가운 빗줄기와 손목의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를 이 세상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는 이제 기억의 수집가가 아닌, 오직 현재를 살아가는 이름 없는 유령이 되어, 안개 자욱한 도시의 끝을 향해 고독한 유영을 이어갔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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