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지워진 자들의 도시
골목 끝, 막다른 벽에 부딪힌 등 뒤로 차가운 습기가 배어들었다. 심장 소리가 귀를 울리는 소음처럼 거칠게 들려왔다. 경비원들의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준오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도시의 바닥이 사실은 거대한 늪이었음을 실감했다. 그는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켜,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배수관 통로로 몸을 던졌다. 비릿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지만, 지금은 그 악취조차 생존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간신히 추격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준오는 숨을 고르며 골목 밖으로 기어 나왔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밤공기가 들어왔지만, 가슴 속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방금 목격한 그 붉은 빛. 순백의 평온을 약속하던 '레테'의 제조 공정 속에 스며들었던 그 이질적인 혈색은, 그가 알고 있던 세계의 질서를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도망치듯 도시의 중심가로 향했다. 하지만 화려한 네온사인이 일렁이는 거리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눈부신 빛의 향연 아래, 사람들은 마치 영혼이 거세된 인형들처럼 무미건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 부딪혀도 사과하지 않고, 누군가 쓰러져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무감각한 흐름.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이 설계한 정교한 무기력이었다.
준오는 길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한 노인을 보았다. 노인의 눈동자에는 슬픔도, 기쁨도, 심지어는 공포조차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저 모든 감정을 약물로 씻어낸 뒤 남은, 매끄럽고 차가운 공백뿐이었다. 준오는 문득 깨달았다. '레테'는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인간다운 본성, 즉 잘못을 저질렀을 때 느끼는 죄책감과 그로 인한 성찰의 기회를 박탈하는 도구였다. 죄책감이 사라진 사회는 통제하기 쉬운, 거대한 부속품들의 집합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다.
"결국,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세뇌의 현장이었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창고에서 보았던 그 붉은 액체는, 아마도 인간의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주입되는 특수한 성분 혹은 그 부작용의 산물일 것이었다. 제조 공정 기록지가 폐기되었다는 말은, 그 부작용을 은폐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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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오는 서둘러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낡은 가구들과 먼지 쌓인 시계들이 있는 그곳만이 유일하게 그가 숨을 쉴 수 있는 은신처였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주머니 속의 펜던트를 다시 꺼냈다. 손끝에 닿는 금속의 온기는 여전히 서늘했다. 그는 펜던트와 함께 발견했던 종이 조각, [L-0-1-1-2]를 나란히 놓았다.
그는 미친 듯이 기억을 더듬었다. 창고에서 보았던 장면을 머릿속에 다시 그려보았다. 거대한 실린더 속에서 맥동하던 액체, 그리고 그 찰나의 붉은 빛. 만약 그 숫자가 제조 공정의 특정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붉은 빛은 그 공정의 핵심적인 변수일 터였다.
그는 낡은 수첩을 펼쳐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L은 레테(Lethe)의 약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숫자는 공정의 일련번호이거나, 혹은 약물이 투여되어야 하는 특정 임계값을 의미할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 남은 흉터를 다시 한번 만졌다. 이 흉터가 만들어진 순간과, 이 숫자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때, 작업실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제약회사 '레테'는 최근 신제품의 안정성을 입증하는 임상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발표했습니다. 한서윤 대표는 이번 성과가 인류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위대한 진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라디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우아하고 차분했지만, 준오의 귀에는 그것이 마치 거대한 무덤의 입구를 닫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서윤. 그 이름을 떠올리자 차가운 냉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가 말하는 '진보'란, 결국 인간의 영혼을 거세하여 다루기 쉬운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었던가.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안개가 자욱한 무영의 밤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제 기괴한 환상처럼 다가왔다. 거대한 빌딩들의 그림자가 마치 도시를 짓누르는 거대한 손길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한번 펜던트를 응시했다. 이 작은 물건이 품고 있는 진실이,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물러설 곳은 없었다. 민우의 목소리가, 그 붉은 빛의 잔상이, 그리고 이 무채색의 도시가 내뱉는 침묵이 그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준오는 옷을 챙겨 입었다. 이제는 수집가가 아닌, 진실을 파헤치는 자로서의 움직임이 필요했다. 그는 책상 한구석에 놓인 낡은 지도를 펼쳤다.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 뒤편, 지도가 가리키는 그림자 속에 숨겨진 비밀 연구소의 위치를 찾아내야 했다. 그곳이 이 모든 악몽의 시작이자 끝일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강렬하게 이끌었다.
그는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빗줄기가 예고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채색의 도시 위로 떨어지는 빗물은 마치 세상의 모든 기억을 씻어내려는 듯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