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희생의 제단

유실된 것들의 기록소 · 약 5분

그는 그 낙인을 보며 아주 잠깐, 자신의 존재가 증발해가는 궤적을 응시했다. 맑아진 공기는 역설적으로 그를 더욱 투명하게 만들었다. 고통스러운 잔류사의 압박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독한 공허가 들어찼고, 그 공허는 마치 깨진 그릇 조각처럼 그의 내면을 찌르고 있었다. 이결은 손목의 낙인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소멸의 이정표였다.

그는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던전의 잔향이 남아 있는 거리의 끝자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은 가벼웠으나 정신은 기묘하게 무거웠다. 마치 몸집이 큰 가구를 옮기듯, 그는 자신의 자아를 억지로 끌어내어 세상의 평온이라는 거대한 성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수현은 그 뒤를 따르며 수첩을 쥐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보았다. 이결의 눈동자 속에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일렁이는 빛을. 그것은 의지라기보다는,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으로 내뿜는 불꽃 같은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포기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지워내고 있었다.

"이결 씨, 정말로...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수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이결이 무엇을 잃어가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멈춘다면, 이 도시를 덮쳐오는 잔류사의 파도는 다시금 사람들의 정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이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으나, 그 평온함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슬픔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결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가장 선명했던 기억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것은 동료들과 함께 웃으며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였다. 던전 탐색이 끝나고 마셨던 텁텁한 커피의 맛, 그리고 함께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젖어들었던 그들의 얼굴.

그는 그 기억을 붙잡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이것은 이제 필요 없다.'

그가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순간, 머릿속의 풍경이 마치 잉크가 물에 번지듯 흐릿해졌다. 동료들의 얼굴이 뭉개지고, 그들과 나누었던 약속들이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이결은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연료로 삼아, 아직도 꿈틀거리는 던전의 잔류사를 억제하는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있었다.

"이결 씨!"

수현이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불렀다. 그녀는 보았다. 이결의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그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아의 뿌리가 뽑혀 나가는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이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고, 그의 눈동자에 서린 희미한 빛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그는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아직 정화되지 않은, 인류의 공포가 응축된 심연의 가장 깊은 곳으로. 그곳에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의 비명이 엉겨 붙어 있었다. 이결은 자신의 기억을 하나씩, 가장 소중한 것부터 차례로 태워 나갔다. 그가 태우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존재했다는 증거였으며,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흔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잊어갔고, 자신이 누구의 동료였는지, 무엇을 지키고 싶어 했는지에 대한 의지를 잃어갔다. 하지만 그가 자아를 잃어갈수록, 주변을 휘감고 있던 잔류사의 파동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는 스스로를 제단 위에 올린 제물로 삼아, 세상의 비극을 봉인하는 거대한 뚜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 ✦

밤의 도시는 여전히 화려했다. 전광판에서 뿜어지는 인공적인 빛은 사람들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고, 거리에는 활기찬 소음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이 평온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보도블록 아래,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태워 없애며 지탱해낸 평화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결은 그 군중 속을 유영했다. 그는 이제 그들에게 낯선 이방인이자, 동시에 그들의 일상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이결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정화 장치의 과부하로 인해 새겨진 검은 낙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그저 그가 무언가를 끝냈다는, 혹은 무언가를 지워냈다는 사실만을 증명하는 차가운 흉터에 불과했다. 그는 그 낙인을 보며 아주 잠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내려 애썼으나, 그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나 모든 것을 지켜낸 유일한 존재로서 그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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