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심연의 조각들

유실된 것들의 기록소 · 약 7분

이결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수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처음으로, 지워지지 않는 어떤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 결의는 파괴적인 투지라기보다, 벼랑 끝에 선 자가 내뱉는 마지막 숨결에 가까웠다.

"수현 씨,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던전의 공기를 가르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결이 마주한 진실이 단순히 '슬픔의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이제부터 짊어져야 할 무게는 청소부의 의무를 넘어선, 존재의 소멸에 가까운 희생임을.

이결은 다시 정화 장치를 움켜쥐었다. 장치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그는 던전의 심장부, 즉 '핵'이라 불리는 거대한 투명의 공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인류가 버린 기억들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이곳을 닫아야 해요. 아니, 이 모든 흐름을 끊어내야 합니다."

이결이 외쳤다. 그 순간, 공간이 비틀리며 유리엘의 형상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울부짖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그를 억눌렀다. 잔류사의 파동이 파도처럼 밀려와 이결의 시야를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결은 밀려오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 파동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너희는... 우리가 버린 것들이야.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받아들일 거야."

이결이 정화 장치의 출력을 한계치까지 개방했다. 장치는 비명을 지르며 과부하에 걸렸고,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단순히 잔류사를 밀어내는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결의 의지,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억눌러온 자아의 파편들이 응축된 '정화'의 힘이었다.

그 순간, 이결은 보았다.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청소부의 표식이 타오르는 것을. 그것은 단순히 고통을 주는 낙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힘을 끌어내기 위한 매개체이자, 그가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한 지표였다. 표식이 타오를 때마다 이결의 뇌리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결 씨! 조심하세요!"

수현의 비명이 들렸지만, 이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느꼈다. 정화 장치가 작동할 때마다,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어떤 기억들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그것은 마치 누군가 잉크로 그려진 그림을 지우개로 지워내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가 힘을 쏟아부을 때마다, 기적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검은 잔류사들이 눈 녹듯 사라졌고, 벽면에 박혀 있던 비명소리들이 잦아들었다. 지옥 같았던 던전의 내부가 정화의 빛에 씻겨 내려가며, 잠시나마 평온한 공간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정화하는 신성한 의식 같았으나, 그 대가는 이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소멸이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어.'

이결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는 무엇을 잃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마치 자신을 깎아 세상을 빚는 조각가처럼, 자신의 존재를 깎아내어 던전의 오염을 씻어내고 있었다.

"이건... 이결 씨의 힘이 아니에요. 당신의... 당신의 일부를 태우고 있어요."

수현이 울먹이며 외쳤다. 그녀는 보았다. 이결의 눈동자가 점점 투명해지는 것을. 그는 이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이 거대한 슬픔의 파도가 현실을 집어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정화 장치를 핵의 중심부로 밀어 넣었다. 눈부신 백색광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던전 전체를 휘감았고, 그곳에 엉겨 붙어 있던 수만 명의 비명과 고통을 단번에 휘발시켰다.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정화 장치는 타버린 채 꺼져 있었고, 던전의 핵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공기는 이제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비가 그친 뒤의 공기처럼 맑고 투명했다.

"끝났어요... 정말로 끝났어요."

수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결을 부축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결은 살아있었으나, 그가 보였던 그 날카로운 결의는 이제 희미해져 있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의 표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그 어떤 고통도 전하지 않았다.

이결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정화된 공간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평화 속에서 그는 기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은 기분. 그는 무엇을 잃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공허함만이 남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현을 보았다. 수현은 그를 보며 안도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결이 무엇을 지불했는지, 그리고 그가 이제 누구보다도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 ✦ ✦

정화가 끝난 후, 던전의 깊은 곳은 기묘하게도 고요했다. 쏟아져 나오던 잔류사의 파동은 잦아들었고, 기괴하게 뒤틀렸던 벽면은 매끄럽게 펴졌다. 그러나 이 평온은 이결의 희생으로 얻어낸 가느다란 평화였다.

이결은 수현의 부축을 받으며 던전 밖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은 무거웠다. 아니, 무거운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부유감이었다. 그는 가끔씩 멈춰 서서 자신의 손목을 확인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청소부의 표식. 그것은 그가 무엇을 해냈는지, 그리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이결 씨, 괜찮으세요?"

수현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애정이 담긴 걱정이 묻어났다. 이결은 잠시 멈춰 섰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며 대두했다.

"괜찮아요. 이제야... 좀이 편해진 것 같네요."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빈자리가 주는 평온함은 무엇보다 달콤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혹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은 던전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이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을 제물로 바쳐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결은 사람들의 물결 속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는 이제 이름 없는 청소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안다. 자신이 지워버린 그 기억들이, 이 도시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어 사람들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제 홀로 남겨진 길 위에서, 자신이 지워버린 것들의 흔적을 쫓는 대신, 지워진 것들이 남긴 평온을 만끽하며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공기의 파동은 마치 그가 버리고 온 기억들의 마지막 인사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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