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공포의 투영

유실된 것들의 기록소 · 약 7분

"이곳을 닫아야 해요. 아니, 이 모든 흐름을 끊어내야 합니다."

이결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던전의 공기를 가르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결이 마주한 진실이 단순히 '슬픔의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이제부터 짊어져야 할 무게는 청소부의 의무를 넘어선, 존재의 소멸에 가까운 희생임을.

이결은 다시 정화 장치를 움켜쥐었다. 장치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그는 던전의 심장부, 즉 '핵'이라 불리는 거대한 투명의 공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인류가 버린 기억들이 퇴적되어 만들어운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공간이 넓어질수록 공기의 질감은 기이하게 변했다. 그것은 더 이상 액체나 기체의 상태가 아니었다. 밀도가 극도로 높아진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미세한 모래알처럼 피부에 달라붙었고, 그럴 때마다 뇌리를 긁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누군가의 비명, 누군가의 절망, 그리고 누군가의 지독하게 고독한 울음소리. 그것들은 이제 개별적인 소리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파도처럼 굽이치며 그들을 압박해 왔다.

"이결 씨, 봐요. 저기..."

수현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울렸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공동의 중심부였다. 그곳에는 거대한, 혹은 아주 미세한, 수만 개의 형상들이 엉켜 있었다. 그것은 몬스터도, 인간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느끼는 '공포' 그 자체의 형상이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절망,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한 자의 공포, 굶주림과 고독에 시달리는 자의 비명이 뭉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의지의 덩어리. 그것은 외부에서 침입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그러나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버려버린 쓰레기들의 집적이었다.

이결은 한 걸음씩 다가갔다. 정화 장치가 요동치며 비명을 질렀다. 장치의 출력은 한계치에 도달했으나, 그가 마주한 것은 물리적인 파괴가 필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감정의 파도였다.

"이건... 우리 때문이었어."

이결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가 본 것은 단순한 잔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문명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외면하고, 은폐하고, 억눌러온 모든 공포의 투영이었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기억을 지우고, 평온을 위해 슬픔을 방치했다. 그리고 그 방치된 슬픔들이 이 던전의 심장부에서 괴물처럼 자라나, 다시 인간을 집어삼키려 하는 순환의 굴짜기가 완성되어 있었다.

그 순간, 이결의 시야가 일렁였다. 억눌려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그의 의식 속으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보았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인간의 비겁함과 숭고함이 뒤섞인 역사를. 그는 보았다. 사람들이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팔아치운 그 수많은 영혼의 조각들이 어떻게 이 거대한 공동을 채우고 있는지.

"아아...!"

수현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수첩은 이미 검게 타버린 듯한 잔류사로 가득 차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 손끝에 닿는 것은 오직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이결은 그 모든 것을 받아내며 버텼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기억이 충돌했다. 어떤 것은 타인의 것이었고, 어떤 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깊이 매장해 두었던, 동료를 잃던 그날의 참혹한 기억과 마주했다. 그날의 비명, 그날의 피 냄새,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도려냈던 자아의 파편들이 지금 이 거대한 공동의 파동과 공명하며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는 정화 장치의 레버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이건... 당신들이 버린 것이야."

그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당신들이 외면한 슬픔이, 당신들을 잡아먹으려 하는 거야!"

그의 외침은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검은 파도에 휩쓸려 갔다. 이결은 자신의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 인류의 집단적 공포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타격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정신적 침식이었다. 그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고, 몸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이결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손목에 머물렀다. 낡은 가죽 장갑 아래, 억지로 지워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문양 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청소부의 표식.

그것은 이 모든 비극을 묵묵히 수거해야 하는 자에게 부여된 낙인이자, 동시에 그가 이 지옥 같은 의무를 짊어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이정표였다. 그 표식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을 일으키며 그의 정신을 붙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까 보았던 그 비밀 문서의 단어. '기억의 희생'.

그것은 은유가 아니었다. 이 시스템 자체가 누군가의 기억을 제물로 삼아 작동하는 거대한 제단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제단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그는 자신의 기억을 깎아내어 이 거대한 공포의 파도를 잠재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결은 다시 한번 정화 장치를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듭을 짓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깎아내어 이 거대한 슬픔의 파도를 억누르는 방벽이 되기로 했다. 그가 지워야 할 것은 오염이 아니라, 인류가 감당할 수 없어 버린 그들의 자아였다.

"수현 씨, 정신 차려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결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의 목소리처럼 건조하고도 단단했다. 그는 자신을 옥죄는 공포의 파동 속으로, 더 깊은 심연을 향해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그의 눈앞에, 인류가 버린 모든 슬픔이 응축된 거대한 핵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눈동자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자신의 기억 한 조각을 떼어내어 그곳에 바쳤다.

✦ ✦ ✦

이결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수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처음으로, 지워지지 않는 어떤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 결의는 파괴적인 투지라기보다, 벼랑 끝에 선 자가 내뱉는 마지막 숨결에 가까웠다.

"수현 씨,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던전의 공기를 가르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결이 마주한 진실이 단순히 '슬픔의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이제부터 짊어져야 할 무게는 청소부의 의무를 넘어선, 존재의 소멸에 가까운 희생임을.

이결은 다시 정화 장치를 움켜쥐었다. 장치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그는 던전의 심장부, 즉 '핵'이라 불리는 거대한 투명의 공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인류가 버린 기억들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이곳을 닫아야 해요. 아니, 이 모든 흐름을 끊어내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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