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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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신들의 잔해 · 약 4분

밤은 깊고도 무거웠으며, 도시의 잔해는 거대한 짐승의 뼈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한결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몸의 감각조차 희미해져, 자신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수집해온 기억들은 여전히 선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가 수집했던 기억들, 그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능력이라는 초월적 힘이 닿지 못하는 곳, 즉 죽음이 인간의 존엄을 앗아가기 직전의 찰나에 남겨진 영혼의 파편들이었다. 그는 그 파편들을 수집함으로써, 멸망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보존해 온 것이었다.

그는 그 기억들이 지닌 실질적 가치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지도, 과거를 되돌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멸망의 속도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식이었고, 죽어가는 자들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문장이었다. 한결은 그 문장들을 가슴에 품으며,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변이체들의 울부짖음이 사실은 이 지독한 고독을 견디지 못한 생명의 비명이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것은 영웅의 힘이 아니라 단 한 명의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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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 그를 응시하던 의문의 시선, 혹은 그가 지켜온 기억들이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이제는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눈길이었다. 한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 시선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가 그들의 목격자가 되었음을, 그리고 이제는 그가 그들의 기억을 품고 사라질 차례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그 안에는 그가 수집한 수많은 이름과, 그들이 남긴 짧은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지하 전력망이 파괴되어 도시의 모든 빛이 꺼졌지만, 수첩 속의 글자들은 그 어떤 인공적인 조명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결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그가 수집한 가장 마지막 기억, 태윤과 공유했던 그 처절한 고독의 무게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는... 쉬어도 된다."

그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것은 태윤에게 건네는 말이었고,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었으며, 이 도시를 지탱해온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한결은 수첩을 덮었다. 그의 신체는 이제 완전한 마비에 이르러 의지의 영역을 벗어났으나,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깨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방호복도, 초능력도, 영웅의 명예도 필요하지 않은,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평온을 얻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멸망은 계속될 것이고, 도시는 계속해서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기억들은 그 붕괴의 잔해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한결은 그곳에 앉아, 지는 노을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온 고요한 밤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멸망의 끝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마침표였다. 한결은 비로소 긴 잠에 들 듯, 깊고 평온한 숨을 내뱉었다. 도시의 잔해 위로, 아무도 읽지 못할 문장들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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