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늘은 더 이상 푸른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방사능에 절여진 대기는 납빛 먼지로 내려앉아, 도시의 마천루를 거대한 무덤의 비석처럼 옥죄고 있었다. 한때 찬란한 문명의 상징이었을 광장에는 이제 인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변이체들의 잔해와, 주인을 잃은 채 굴러다니는 고철만이 뒹굴고 있었다. 공기는 비릿한 금속성 냄새와 부패한 단백질의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한결은 방호복의 투박한 헬멧 너머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필터는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경고음을 내뱉고 있었고, 가슴팍에 달린 산소 잔량 표시등은 붉은빛으로 점멸했다. 그는 무거운 장화 끝으로 바닥에 흩어진 낡은 인형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유일한 안식처였을 것이고, 이제는 주인을 잃고 방치된 슬픈 유실물이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흔적은 남는 법이지."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초능력을 과도하게 끌어다 쓴 대가로 마비되어 가는 신경계는 매 순간 그에게 날카로운 통증을 선사했다. 손끝이 떨렸고, 시야는 가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처럼 흐릿해졌다. 한때 '백색의 수호자'라 불리며 하늘을 가르고 재난을 잠재웠던 영웅의 손은, 이제 방사능에 오염된 폐허를 훑는 고독한 관리자의 손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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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를 지나며 가끔씩 환청을 들었다. 환호하는 군중의 함성, 영웅의 이름을 연호하던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찬사와 경외의 시선들. 하지만 그 환청은 언제나 차가운 현실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지금 그를 지켜보는 것은 환호하는 대중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폐허와 자신을 갉아먹는 고독뿐이었다.
한결은 주머니 속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그 안에는 그가 매일 밤 수습하는, 이제는 주인 없는 기억들의 파편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청소부라 정의했다. 멸망의 속도를 늦추는 자, 죽어가는 도시의 마지막 온기를 보존하는 자. 그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주 미세한 시간의 연장이라도 남겨두기를 바랐다.
저 멀리, 변이된 괴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결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장비를 확인했다. 영웅의 시대는 끝났고, 신들은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하루를 버텨내는 인간의 의지뿐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잿빛 먼지가 자욱한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