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림자 속에 드리운 공허

기억을 굽는 빵집과 달콤한 마법 · 약 8분

루나는 밀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백색광을 머금은 반죽은 마치 생명력을 잃어가는 시체처럼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창밖의 보랏빛 안개는 더욱 짙어져 이제는 도시의 가로등조차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흐릿한 장막이 되었다. 루나는 고개를 돌려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그 시선은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게 루나의 손끝을 쫓고 있었다.

"그 문양 말이에요, 카엘. 당신이 노이즈라고 치부했지만... 그건 분명히 의도된 흔적이었어요."

루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가시지 않은 의구심과 미세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카엘은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대꾸했다.

"기억은 유기적인 산물입니다, 루나. 때로는 주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파편화된 감정이 엉겨 붙어 기괴한 형태를 띠기도 하죠. 당신의 공감 능력이 과잉되어 존재하지 않는 위협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했지만, 루나는 보았다. 그가 말을 마친 순간,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옷깃을 매만지는 동작이 아주 미세하게 주춤거렸다는 것을. 그것은 방어적인 태도라기보다,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진실을 억누르는 자의 버거움에 가까웠다. 루나는 다시 반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문양은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강제로 새겨 넣은 낙인처럼, 기억의 흐름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거대한 힘의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딸랑, 하고 가게 문이 다시 한번 울렸으나 이번에는 종소리가 맑게 퍼지지 못했다. 소리는 마치 젖은 솜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둔탁하게 잦아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문가에 선 이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려 있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가슴팍을 쥐어짜며 괴로워했다.

"내... 내 딸의... 웃음소리가... 안 들려..."

노인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루나는 본능적으로 노인에게 다가가려 손을 뻗었으나,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굳어버렸다. 노인의 머리 위로, 마치 잉크가 물에 퍼지듯 검고 탁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의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채 자체가 거세된, 존재의 말소(抹消)를 의미하는 검은 안개였다.

"어르신, 진정하세요."

루나가 다급하게 외쳤으나 노인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는 순간, 노인이 지니고 있던 작은 보석함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노인의 소중한 추억이었을 '기억의 파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루나가 보았던 그 어떤 파편보다도 희미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뜯어낸 듯, 파편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허공에서 증발하듯 사라져 갔다.

"아니야...!"

루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타인의 기억이 증발하는 순간, 그녀의 의식 속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깎여 나가는 듯한, 영혼의 일부가 도려내어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었다. 루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카엘 역시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건... 단순한 기억의 소실이 아닙니다."

카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노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를 응시했다.

"기억이 약탈당하고 있어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도시의 기억을 추출하고 있습니다."

✦ ✦ ✦

루나는 떨리는 손으로 노인을 부축해 앉혔다. 노인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나는 공포에 질린 채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따뜻하게 빛나던 빵들이, 이제는 마치 색이 바랜 종이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카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도시의 색이... 사라지고 있어요."

루나의 물음에 카엘은 차가운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글리머의 중심부에서 시작된 현상입니다. 누군가가 기억의 밀도가 높은 장소들을 거점으로 삼아, 도시의 모든 기억을 강제로 추출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글리머는 자아를 잃고 껍데기만 남은 무채색의 폐허가 될 겁니다."

그는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루나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그가 수집한 기록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이건 제가 확인한 것들입니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공허뿐입니다."

루나는 종이를 받아 들었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검은 안개와 노인의 고통스러운 표정만이 맴돌았다. 그때, 가게 문이 다시 한번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이 도시의 상인 중 하나로 알려진, 품위 있는 차림새의 사내였다. 그는 루나와 카엘을 확인하자마자 긴박하게 입을 열었다.

"루나 님, 지금 밖은 지옥입니다. 당신의 빵집이 위치한 골목도 예외는 아니에요."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도시의 기억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슬픈 기억을 파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있어요. 제가 본 것은... 검은 안개였습니다. 그것은 기억의 밀도가 높은 곳을 집어삼키며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루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바실, 그 집정관의 그림자가 드디어 현실로 드러난 것인가.

"검은 안개라고요?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죠?"

루나가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그것은 기억이 타버린 재입니다. 하지만 불타는 재가 아니에요. 존재 자체가 지워지면서 생기는 공허의 흔적이죠. 특히 기억이 풍부한 곳, 즉 사람들의 추억이 모이는 장소에서 그 안개가 가장 짙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고 급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마치 도망치듯 다급했다.

"카엘, 저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켜온 것들이 모두 위험에 처해 있다는 뜻이네요."

루나는 카엘을 바라보았다. 카엘은 말없이 자신의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가 가져온 기억의 파편들, 그리고 그 속에 새겨져 있던 기이한 문양. 그것은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라, 이 거대한 약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문양...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카엘이 낮게 읊조렸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지가 아니라, 어떤 거대한 의지의 파편이 강제로 박아 넣은 낙인이었습니다. 루나, 당신이 느꼈던 그 차가운 슬픔은 사실 도시 전체가 겪고 있는 공포의 조각이었을 겁니다."

루나는 다시 작업대 앞에 섰다. 이제 그녀 앞에는 따뜻한 빵이 아닌,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놓여 있었다. 창밖의 보랏빛 안개는 이제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그 검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도시의 골목골목을 파고들고 있었다.

"준비해야 해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이 공허가 도시를 삼키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루나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눈빛은 오븐의 불꽃처럼 단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검은 안개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누군가가 설계한 완벽한 정적의 설계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설계도의 중심에, 자신을 지켜보며 차갑게 미소 짓는 바실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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