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기억의 저장고로 향하는 길

기억을 깁는 노인과 사라진 색깔의 아이 · 약 6분

안개는 더욱 짙은 농도로 그들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그들은 이제 마을의 가장 깊은 곳, 모든 기억이 수렴되는 ‘기억의 저장고’의 입구에 도달했다. 이곳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공간이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이 실타래가 되어 엉키고 설키는 거대한 도서관이자 성소였다. 바르디는 이안의 떨리는 손을 지탱하며, 마치 성벽을 넘는 병사처럼 단단한 표정으로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저장고 내부로 들어서자, 외부의 차가운 안개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그곳은 수만 가닥의 실들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그물처럼 얽혀 있는 공간이었다. 어떤 실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고, 어떤 실은 짙은 자색으로 고요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그 수많은 실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도드라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뜯어내졌던 무채색의 실들이었다.

"이곳이 바로 기억의 저장고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실의 형태로 저장되는 곳이지."

바르디의 목소리가 높은 천장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이안은 압도적인 풍경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수많은 실이 공중에서 서로를 붙잡고 있었으나, 그중 상당수는 엉켜버려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이안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갔던 그 무채색의 실들이 다른 사람들의 실과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타인의 옷자락에 자신의 옷이 엉켜버린 것과 같은 기묘한 배치였다.

"아저씨, 저기 보세요. 제 실이... 다른 사람들의 실이랑 엉켜 있어요."

이안이 가리킨 곳에는 누군가의 슬픔이 깃든 청회색 실과, 누군가의 기쁨이 담긴 연분홍색 실이 이안의 무채색 실과 단단히 꼬여 있었다. 이안은 당혹감에 물러서려 했으나, 바르디는 이안의 어깨를 짚으며 그를 붙잡았다.

"그렇단다, 얘야. 기억은 결코 홀로 존재하는 섬이 아니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은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새겨지지만 동시에 우리의 기억 속에도 자리를 잡지. 네가 잃어버린 기억들은 타인의 기억과 얽히고, 그들의 기억 또한 너의 일부가 되었을 게다. 그러니 네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은 단순히 네 과거를 캐내는 것이 아니라, 너와 연결된 모든 인연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내는 과정이 될 거야."

바르디의 말에 이안은 처음으로 기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안은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단순히 '비어 있음'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뒤섞여 정체성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란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너를 지탱해 주는 뿌리이지. 나무가 뿌리 없이 서 있을 수 없듯, 인간도 기억이라는 뿌리 없이는 오늘을 버텨낼 수 없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한다는 것은, 네가 누구와 함께 웃었는지, 어떤 아픔을 견뎌냈는지를 기억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지금의 네가 존재한다는 증거란다."

바르디의 낮은 목소리가 이안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이안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은색 실을 내려다보았다. 은색 실은 마치 이 복잡한 실타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나침반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그때, 저장고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이안은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고목을 보았다. 그것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고목보다 훨씬 거대했고, 수많은 실이 나무껍질에 마치 혈관처럼 파고들어 있었다. 하지만 고목의 밑동에는 검은색의 점액질 같은 그림자가 스며들고 있었다.

"기억은 뿌리다... 그러니 뿌리를 잘라내면 고통도 사라지겠지."

그림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안의 귓가를 긁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차가웠다. 그림자는 고목의 뿌리 사이를 파고들며 이안의 의식을 흔들었다.

"이안, 보아라. 저 실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엉켜 있는지. 저것을 다 풀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느냐? 기억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너는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왜 굳이 그 고통을 자처하느냐? 그냥 모든 것을 잊고 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라. 그곳에선 아무도 너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림자의 유혹에 이안의 무릎이 떨렸다.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 이름표에서 보았던 그 강제적인 탈취의 흔적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 아이의 이름을, 그리고 존재를 지우려 했다는 사실. 그것은 단순히 잊힌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삭제'당했다는 공포스러운 진실이었다.

"아니야...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러니 내가 나를 찾아내야 해."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이안은 바르디가 말한 '뿌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쓰러지지만, 뿌리가 살아있다면 나무는 다시 자랄 수 있다. 이안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오려던 무채색 실들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바르디는 이안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그의 눈은 날카롭게 그림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억은 아픈 것이지만, 그것은 너를 정의하는 유일한 색깔이다.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다름없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마주할 모든 기억이 비록 아플지라도, 그것은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바르디의 말에 힘입어 이안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안은 이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표식과 바르디가 준 은색 실을 의지하며, 자신을 억압하는 그림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나는... 이안이다. 나는 내 이름을 찾을 거야."

이안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처음으로 단단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 순간, 이안의 손에 쥐어진 은색 실이 반응하듯 강하게 요동치며 은빛 파장을 사방으로 뿌려냈다. 차가운 안개와 그림자의 압박이 잠시 주춤했다. 이안은 이제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목의 뿌리가 얽힌 가장 깊은 곳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곳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 깊고 아픈 기억의 조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차

P 프롤로그색을 잃어가는 마을에서 기억의 수선공이 마주한 무채색의 아이. 1 안개 속의 무채색 아이기억을 잃어가는 아이와 그 존재를 지키려는 수선공의 이야기. 2 기억의 실타래를 풀다잃어버린 이름과 강제로 지워진 기억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3 색을 잃어버린 마을의 풍경무채색의 마을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은색 실의 여정이 시작된다. 4 망각의 그림자의 속삭임안개 속에서 마주한 기억의 유혹과 그림자의 위협을 견뎌내며 나아가는 여정. 5 기억의 저장고로 향하는 길엉켜버린 기억의 실타래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뿌리를 찾아 나선다. 6 슬픔의 색채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인 이안이 자아를 찾아 나선다. 7 엘린의 경고자아를 삼키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진정한 뿌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 8 엉킨 실타래의 매듭지워진 이름 속에서 발견한 진실과 잃어버린 자아를 향한 여정. 9 망각의 그림자와의 대치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인 아리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10 진정한 이름의 회복아픈 기억을 껴안고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는 여정. 11 색깔을 되찾은 아이빛으로 물든 아리, 마을의 색을 되찾다. E 에필로그아리의 변화를 통해 마을은 기억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생명력과 희망으로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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