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실타래를 풀다
바르디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작업대 위에 놓인 커다란 나무 틀을 가져왔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직조기처럼 보였으나, 그 위에는 실 대신 사람들의 기억이 얽혀 있었다. 바르디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려던 무채색의 실 한 가닥을 낚아챘다. 그 순간, 공중에는 옅은 잔상이 남았다.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의 파편 같기도 했고, 혹은 어떤 장소에서 느꼈던 온기 같기도 했다.
"보아라, 얘야. 기억이란 것은 이렇게 실처럼 엉켜 있는 것이란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순간은 이 실 속에 한 줄 한 줄씩 새겨지지. 어떤 기억은 단단하게 꼬여 있어 쉽게 풀리지 않고, 어떤 기억은 너무나 가벼워서 바람 한 점에도 흩어지려 하지."
바르디는 아이의 손을 잡아 그 실을 만지게 했다. 아이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이내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갔던 그 실이 자신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실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끊어진 악기의 현이 울리는 듯한 미세한 진동이었다.
"기억은 우리를 지탱하는 뿌리이자,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무늬다. 네가 지금 느끼는 이 공허함은 네가 누구인지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이 실들이 엉켜버렸기 때문이야. 우리는 이 실들을 하나씩 풀고, 올바른 위치에 다시 꿰매어 주어야 한다."
바르디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아이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실들을 관찰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구성하던 조각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았다. 아이의 눈동자는 점점 흔들렸고, 무채색의 몸은 더욱 창백하게 질려갔다. 바르디는 아이의 불안을 달래듯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바르디가 작업대 아래에 놓인 오래된 보관함들을 정리하던 중,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굴러온 주머니는 낡고 해진 상태였다. 바르디는 그것을 집어 들어 먼지를 털어냈다.
"이것은... 네 것이로구나."
바르디가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는 작고 낡은 금속판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이의 이름이 새겨진 표식이었다. 아이은 그 표식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울림은 환희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아이은 떨리는 손으로 그 표식을 집어 들었다. 표면에는 희미하게 '이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이이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바르디의 눈이 가늘어졌다. 표식의 표면에는 누군가가 억지로 뜯어낸 듯한 거칠고 날카로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닳아 없어진 자국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아주 강한 힘을 동원해 이 표식을 아이의 몸에서 분리해낸 것 같은, 고의적이고 폭력적인 흔적이었다.
바르디는 표식을 쥔 아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긴장감이 서렸다.
"이건... 자연스럽게 떨어진 것이 아니구나."
바르디의 낮은 목소리가 가게 안의 정적을 깼다. 아이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표식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지만, 아이은 그 표식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의지하려는 듯 놓지 않았다.
"누군가가... 네 이름을 뺏어갔어. 아니, 네가 누구인지 잊게 만들려고 이 표식을 강제로 떼어낸 거야."
바르디는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우려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이은 고개를 들어 바르디를 보았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다시금 혼란과 두려움이 일렁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다는 아주 작은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이안... 내 이름은 이안이었어요."
아이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낙엽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자의, 아주 작지만 단단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바르디는 알고 있었다. 이 표식이 뜯겨 나간 흔적은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워진 흔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흔적은 아이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무채색의 실들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바르디는 다시 작업대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아이의 표식에 남은 흔적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어떤 힘이 이 아이의 기억을 난도질했는지 추론하기 시작했다. 가게 밖의 안개는 더욱 짙게 밀려들어 오고 있었고,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처럼 아이의 발끝을 차갑게 훑고 지나갔다.
"이안, 이제 우리는 이 표식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야 한다. 네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남아 있을 거야.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 네가 잃어버린 색깔들을 하나씩 되찾아 올 것이다."
바르디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이제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왜 잃어버렸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이름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의 무채색 몸 위에는 아주 미세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게 문 너머, 안개 속에서 지켜보던 그림자는 이제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았다. 그림자는 마치 아이의 이름을 알아차린 것처럼, 더욱 거대하고 불길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마을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보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