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안개 속의 무채색 아이

기억을 깁는 노인과 사라진 색깔의 아이 · 약 6분

바르디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이의 피부는 차가웠으나, 그 차가움은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온기가 휘발된, 마치 오래된 종이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감촉이었다. 아이는 바르디의 품에 안기듯 몸을 떨었고, 그 순간 바르디의 시선이 아이의 옷자락 끝에 머물렀다. 그곳에서는 희미하게 빛을 잃은 회색 실들이 마치 끊어진 생명줄처럼 바닥으로 툭, 툭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의 정체성을 지탱하던 기억의 파편들이 주인을 잃고 해체되는 비명이었다.

"무서워하지 말거라. 여기는 안전하다. 네가 잃어버린 것들이 어디로 도망치든, 이곳에서만큼은 그 실타래를 붙잡아줄 수 있단다."

바르디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그저 젖은 눈망울로 바르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없는 공백만이 가득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기를, 혹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주기를 갈망하는 고독한 섬처럼 보였다.

바르디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가게 안쪽으로 이끌었다. 가게 안은 수천 개의 실타래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떤 실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으로, 어떤 실은 깊은 바다 같은 푸른색으로 일렁였으나, 이 아이의 몸에서 떨어지는 실은 그 어떤 색도 묻지 않은 무채색이었다. 그것은 마치 잉크가 빠진 수채화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색이었다.

"여기는 기억의 수선공이 운영하는 곳이란다. 사람들은 때로 너무 무거워서 버리고 싶어 하는 기억을 가져오기도 하고, 너무 소중해서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행복을 가져오기도 하지. 나는 그 엉킨 실들을 풀고, 해진 부분을 튼튼하게 꿰매어 주는 사람이야."

바르디는 아이를 낡은 의자에 앉히며 자신의 작업대 위에 놓인 도구들을 정리했다. 기름칠 된 가위, 끝이 뭉툭한 바늘, 그리고 각종 색깔이 배어 있는 실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바르디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으나, 바르디의 따뜻한 시선이 닿자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 긴장이 풀리는 듯 보였다.

"너는 지금 네 자신을 구성하는 실들이 풀려나가고 있구나. 기억은 우리를 지탱하는 뿌리란다. 뿌리가 뽑히면 나무가 쓰러지듯,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는 누구인지 잊게 되지. 네가 누구인지, 네 부모님이 누구인지, 네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모든 것이 이 실타래 속에 담겨 있단다."

바르디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이의 손등 위로 흐르는 무채색의 실들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실들이 바닥에 닿는 순간, 차가운 바닥과 맞닿으며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바르디는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기억이 소멸하는 것은 곧 그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과 같았다.

"이름이 뭐니? 네가 기억하는 마지막 이름이라도 좋으니 말해보렴."

바르디의 물음에 아이는 입을 달싹였다. 아이는 무언가 말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아무것도 끌어올릴 수 없는 공허함에서 오는 절망에 가까웠다. 아이는 가슴을 움켜쥐며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기억이... 나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아이의 목소리는 가냘픈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 같았다. 바르디는 아이의 손을 더욱 꽉 쥐어주었다. 아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채색의 실들은 이제 더 빠르게 바닥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아이의 기억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실들은 엉키고 설키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바르디는 직관적으로 느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잊힌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아이의 기억을 강제로 앗아가고 있었다. 가게 밖, 안개 속에 서 있는 그 거대한 그림자가 아이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바르디는 고개를 들어 가게 문 쪽을 보았다. 문밖의 안개는 더욱 짙게 일렁였고, 차가운 냉기가 문틈을 타고 들어와 바닥에 닿은 실타래들을 얼려버리는 듯했다.

바르디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작업대 구석에 놓인 낡은 상자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특별한 실타래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걱정 마라. 우리가 함께 찾아낼 수 있다. 네가 누구인지, 네가 어떤 색을 가졌었는지, 우리는 반드시 찾아낼 거야.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길을 잃은 것뿐이니까."

바르디는 아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이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바르디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동자에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가 튀는 듯했다. 바르디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때, 바르디의 시선이 작업대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혹은 주인을 잃어버린 낡은 은색 실타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실과도 달리 은은한 달빛 같은 광택을 내뿜으며, 마치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처럼 매끄럽게 말려 있었다. 바르디는 그 은색 실타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아이의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부터 네가 누구인지 함께 찾아보자꾸나."

바르디의 나직한 목소리가 차가운 안개가 감도는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아이는 바르디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게 밖, 안개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그림자는 더욱 깊고 검게 변해갔다. 기억을 잃은 아이과 그 아이의 기억을 지키려는 노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삼키려는 망각의 그림자가 얽힌 기묘한 인연이 이 낡은 바느질 가게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목차

P 프롤로그색을 잃어가는 마을에서 기억의 수선공이 마주한 무채색의 아이. 1 안개 속의 무채색 아이기억을 잃어가는 아이와 그 존재를 지키려는 수선공의 이야기. 2 기억의 실타래를 풀다잃어버린 이름과 강제로 지워진 기억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3 색을 잃어버린 마을의 풍경무채색의 마을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은색 실의 여정이 시작된다. 4 망각의 그림자의 속삭임안개 속에서 마주한 기억의 유혹과 그림자의 위협을 견뎌내며 나아가는 여정. 5 기억의 저장고로 향하는 길엉켜버린 기억의 실타래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뿌리를 찾아 나선다. 6 슬픔의 색채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인 이안이 자아를 찾아 나선다. 7 엘린의 경고자아를 삼키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진정한 뿌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 8 엉킨 실타래의 매듭지워진 이름 속에서 발견한 진실과 잃어버린 자아를 향한 여정. 9 망각의 그림자와의 대치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인 아리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10 진정한 이름의 회복아픈 기억을 껴안고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는 여정. 11 색깔을 되찾은 아이빛으로 물든 아리, 마을의 색을 되찾다. E 에필로그아리의 변화를 통해 마을은 기억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생명력과 희망으로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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