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망각의 그림자의 속삭임

기억을 깁는 노인과 사라진 색깔의 아이 · 약 6분

안개는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장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끈적이는 점성을 지닌 채 피부에 달라붙었고, 이안의 귓가에는 젖은 솜이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안은 바르디의 손을 쥔 채로 한 발짝을 내디뎠으나, 발밑의 지면은 마치 늪처럼 불분명하게 흔들렸다. 그때였다. 차가운 냉기가 살을 에는 듯한 감각과 함께, 안개가 거대한 파도처럼 소용돌이치며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잊어라... 잊는 것이 가장 편안한 길이다..."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 뇌를 직접 긁어내는 듯한 환청에 가까웠다. 이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형체가 없는 검은 그림자였으나, 동시에 실체가 있는 것보다 더 무겁게 이안의 가슴을 짓눌렀다. 망각의 파수꾼, 혹은 그림자라 불리는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얘야, 정신을 차리거라!"

바르디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는 은색 실타래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이안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하지만 그림자는 바르디를 비껴가며 오직 이안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림자의 손끝이 이안의 귓가에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소거되었다. 오직 이안의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공포의 박동만이 선명해졌다.

"왜 그리 괴로워하느냐? 기억이란 것은 날카로운 가시와도 같단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찌르는 일이지. 그저 놓아버려라. 모든 것을 지우면, 너는 비로소 평온한 무(無)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림자의 유혹은 달콤한 독약처럼 이안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기묘한 환영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환상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집 앞마당,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목소리.

"이안, 이리 오렴."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아주 오래전, 너무나 선명해서 가슴이 저릿하게 만드는 그 음성.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목소리는 이안이 가장 그리워했던, 그러나 가장 아프게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이었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온기가 손끝에 닿는 것만 같았다. 이안의 무채색이었던 가슴팍에 아주 미세한 분홍빛이 스며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니야, 이건 가짜다!"

바르디의 외침이 환상을 찢어발겼다. 바르디는 이안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이안! 보지 마라! 저것은 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덫이다!"

그림자의 유혹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이안의 몸에서 빠져나오던 무채색의 실들이 이제는 마치 뼈가 깎여 나가는 듯한 고통을 동반하며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보았다. 자신의 팔과 다리가 안개 속으로 녹아내리는 것처럼, 존재의 색깔이 빠져나가는 듯한 끔찍한 환상을.

"보아라, 네가 붙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너를 갉아먹는지. 기억은 너를 죽이는 독이다. 그것을 버리고 우리와 함께 영원한 정적 속으로 들어오너라."

그림자는 이안의 몸을 휘감으며 속삭였다. 이안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자아를 잃어가는 존재가 내뱉는 비명이었다.

바르디는 바닥에 놓인 은색 실타래를 움켜쥐었다. 그는 이안의 손을 더욱 단단히 붙잡으며, 마치 이안의 영혼을 붙들어 매는 닻처럼 버티고 섰다.

"이안, 나를 봐라! 네 이름은 이안이다. 너는 이 마을의 아이이며, 너는 네 자신의 주인이다! 저 그림자가 보여주는 것은 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네가 지켜내야 할 것들뿐이다!"

바르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나 그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바르디가 쥐고 있던 은색 실타래가 반응하듯 눈부신 은빛을 뿜어냈다. 차가운 안개를 가르는 그 빛은 그림자의 검은 그림자를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이안은 그 빛에 의지해 눈을 떴다. 그림자가 보여준 가짜 환영—엄마의 미소와 따스한 마당—은 순식간에 일렁이며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차가운 안개와 바르디의 간절한 눈빛만이 남았다. 이안은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깨달았다. 저 그림자가 보여준 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을 잃어버린 자의 공포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아니야... 엄마는... 엄마는 나를 지우려고 하는 게 아니었어."

이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림자는 분노한 듯 포효하며 안개를 더욱 거세게 휘몰아치게 했다. 이안의 몸에서 빠져나갔던 실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한 기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첫 번째 기억의 조각, '어머니의 목소리'를 마주하며 얻어낸 작은 승리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 그것은 더 깊은 곳에 숨겨진, 더 아픈 기억들을 노리고 있었다. 안개는 다시 짙어지며 두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가 가진 기억은 너무나도 많으니..."

그림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안개 속에 섞여 들었다. 바르디는 이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안개 너머, 더 깊은 곳에 위치한 '기억의 저장고'를 향해 다시 발을 뗐다. 발끝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이안의 손에 쥐어진 은색 실은 이제 이전보다 조금 더 따스하게 온기를 품고 있었다.

목차

P 프롤로그색을 잃어가는 마을에서 기억의 수선공이 마주한 무채색의 아이. 1 안개 속의 무채색 아이기억을 잃어가는 아이와 그 존재를 지키려는 수선공의 이야기. 2 기억의 실타래를 풀다잃어버린 이름과 강제로 지워진 기억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3 색을 잃어버린 마을의 풍경무채색의 마을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은색 실의 여정이 시작된다. 4 망각의 그림자의 속삭임안개 속에서 마주한 기억의 유혹과 그림자의 위협을 견뎌내며 나아가는 여정. 5 기억의 저장고로 향하는 길엉켜버린 기억의 실타래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뿌리를 찾아 나선다. 6 슬픔의 색채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인 이안이 자아를 찾아 나선다. 7 엘린의 경고자아를 삼키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진정한 뿌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 8 엉킨 실타래의 매듭지워진 이름 속에서 발견한 진실과 잃어버린 자아를 향한 여정. 9 망각의 그림자와의 대치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인 아리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10 진정한 이름의 회복아픈 기억을 껴안고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는 여정. 11 색깔을 되찾은 아이빛으로 물든 아리, 마을의 색을 되찾다. E 에필로그아리의 변화를 통해 마을은 기억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생명력과 희망으로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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