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세상의 모든 색이 휘발되어 버린 듯한 마을, 그곳은 언제나 눅눅한 안개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안개를 기억이라 불렀다. 누군가 잊고 싶어 하는 슬픔이 뭉쳐서 만들어진 안개는 때로 끈적하게 몸을 휘감았고, 너무 소중해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길을 잃게 만들었다. 마을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고목은 사람들의 마음이 투영된 빛깔로 명멸했으나, 최근 들어 그 빛은 눈에 띄게 파소해져 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지우개로 세상을 닦아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을은 점점 채도를 잃어가는 무채색의 풍경으로 변해갔다.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 낡은 가죽 냄새와 오래된 실타래의 향기가 배어 있는 바느질 가게가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의 엉킨 기억을 풀어내고, 해진 추억을 꿰매어 주는 '기억의 수선공' 바르디의 작업실이었다. 바르디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며, 실처럼 뽑혀 나오는 기억의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에게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잔해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을 지탱해 주는 뿌리이자 영혼의 무늬였다.
그날은 유독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평소보다 무거운 공기가 가게 문 앞을 맴돌았고, 바르디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문쪽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차가운 안개와 함께 정체 모를 존재가 밀려 들어왔다.
"도와주세요."
갈라진 목소리가 고요한 가게 내부를 울렸다. 바르디는 고개를 들어 문가에 서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 어디에도 색이 존재하지 않았다. 옷도, 머리카락도, 피부도 마치 흑백 사진 속에 갇힌 것처럼 생기를 잃은 채였다. 아이였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 초점 없는 눈동자로 바르디를 바라보았으나, 그 눈빛만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바르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몸 주변으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무채색의 실들이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그러나 결국 손에서 빠져나간 기억의 실타래였다.
"얘야, 너는 어디서 왔느냐?"
바르디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실들은 마치 끊어진 줄처럼 힘없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바르디는 직감했다. 이 아이는 단순히 기억을 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색깔 자체를 빼앗긴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이 아이의 등 뒤로, 차갑고도 거대한 그림자가 안개 속에서 소리 없이 드리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