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괴물의 거울
불길이 잦아든 자리는 검은 흉터처럼 남았다. 거대한 창고의 잔해 속에서 솟구치던 연기는 이제 낮게 가라앉아, 타버린 고무와 기름, 그리고 정체 모를 유기물이 섞인 매캐한 악취를 풍기며 발치에 머물렀다. 태석은 불타는 제국의 잔해를 등진 채, 차갑게 식어가는 아스팔트 위에 앉아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공기가 폐부를 찌를 때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저지른 파괴가 실재하는 현실인지 아니면 지독한 환각인지 가늠하려 애썼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각은 축축하고 뜨거웠다. 자신의 피인지, 아니면 타버린 무언가의 잔해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석은 주머니 속에서 은색 라이터를 꺼냈다. 이제 불꽃을 피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손안에서 굴러다니는 차가운 금속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는 라이터를 쥐고, 무너진 창고의 벽면에 비친 자신의 형상을 응시했다.
✦ ✦ ✦
안개가 걷히지 않은 도시의 새벽은 잔인할 만큼 고요했다. 태석은 근처의 낡은 공중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깨진 타일과 녹슨 세면대가 뒹구는 그곳은, 지금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는 세면대에 고인 검은 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차가운 물이 눈과 코를 때렸지만, 가슴 속을 파고드는 타오르는 듯한 불쾌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거울 속의 남자는 낯설었다. 아니, 그것은 그가 알던 한태석이 아니었다. 뺨에는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고,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채 탁한 안개처럼 흐릿했다. 무엇보다 그를 소름 끼치게 만든 것은 눈빛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날을 세웠던 그 서늘한 살의가 눈동자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이게... 나인가."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그는 승리했다. 강도준의 제국을 무너뜨렸고, 그가 그토리 지키려 했던 추악한 자금의 흐름을 끊어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무엇을 얻었는가. 거울 속의 사내는 정의를 실현한 영웅이 아니라, 그저 피에 굶주려 사냥감을 물어뜯은 괴물에 불과했다. 타인을 파괴하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고, 결국엔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모두 태워버린 괴물.
그는 문득 박철수가 남긴 마지막 말들을 떠올렸다. 그가 남긴 장부가 단순한 자금 기록이 아니라, 도시의 심장을 멈추게 할 '설계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전율. 박철수는 왜 자신을 이 지옥의 문턱까지 밀어 넣었는가. 그가 말했던 이면의 세계는 단순히 권력의 뒷면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발을 들일 수 있는 심연이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박철수가 자신에게 원했던 것은 진실의 폭로가 아니라, 이 도시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살아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었음을.
그는 자신을 도구로 써먹은 스승의 의도를 깨닫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거대한 허무에 가까웠다.
✦ ✦ ✦
태석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불길이 잦아든 창고 근처에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의 그 은색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이 라이터가 자신의 마지막 유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모든 소동이 끝난 뒤, 자신에게 남은 것이 오직 이 차가운 금속뿐이라면.
그는 라이터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는 그을음이 가득했고, 손톱 밑에는 검은 때와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이 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졸랐고, 누군가의 심장을 겨누었다. 이 손은 이제 다시는 깨끗한 물로 씻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다 똑같은 거였어."
강도준이 쌓아 올린 성벽도, 유진이 쳐놓은 정교한 그물도, 그리고 자신이 지키려 했던 마지막 인간성도. 이 도시의 안개 속에서는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덧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파괴한 폐허 위에 홀로 남겨진 채, 다가올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유령처럼 서 있었다.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빛조차 투과하지 못할 만큼 무거운 침묵이 도시를 짓누르고 있었다. 태석은 멀리 보이는 항구의 불빛을 응시했다. 그 불빛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가야 할 길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천천히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엔진을 깨우는 소리가 안개를 찢으며 고요를 흔들었다. 그는 자신이 남긴 불길이 아직 채 식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 불길은 그가 가진 마지막 온기였을지도 모른다.
태석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여전히 잿빛의 세계였다.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엔진의 진동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때렸다. 이제 그는 돌아갈 곳도, 머물 곳도 없었다. 오직 이 안개가 끝나는 곳까지, 혹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불타는 제국의 잔해와, 그 속에 묻힌 자신의 비참한 초상화를 남겨둔 채, 태석은 어둠이 짙게 깔린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