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안개 속의 수리공
기름때 절은 장갑을 벗어 던진 태석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엔진 오일이 섞인 차가운 빗물이 정비소의 낡은 차양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고인 검은 물웅덩이를 휘저었다. 그는 젖은 수건으로 손을 닦아내며 창밖의 항구를 응시했다. 안개에 잠긴 항구는 거대한 짐승의 식도처럼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
정비소 안은 매캐한 휘발유 냄새와 녹슨 철의 비린내로 가득했다. 태석은 구석에 놓인 낡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누군가 거대한 바위로 해안벽을 두드리는 듯한 불길한 박동을 품고 있었다. 박철수가 말했던 '이면의 세계'는 아마 이런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는지도 몰 모른다.
"이보게, 한 선생. 또 그 멍한 눈으로 바다만 보고 있는 건가?"
적막을 깨고 들어온 목소리는 빗소리보다 날카로웠다. 태석은 고개를 들어 문가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다려진 코트와 잘 닦인 구두. 이 누추한 정비소와는 결이 다른 이물질 같은 존재였다. 사내는 태석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정비소 내부를 불쾌하다는 듯 훑어내렸다.
"물건은 다 고쳐놨나? 자네 오토바이가 이 동네에서 제일 빠르다던데, 정작 주인은 늘 제자리걸음이군."
사내는 태석의 삶을 꿰뚫어 보는 듯한 냉소적인 말투를 던졌다. 태석은 대답 대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는 이 불청객이 누구인지, 어떤 의도를 품고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해안시에서 돈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 이유 없이 움직이는 법은 없었으니까.
"말씀하신 건 다 끝냈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용건만 하시죠."
태석의 무심한 태도에 사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눈가에 닿지 못한 채 입가에서 멈췄다. 사내는 품 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기름때 묻은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다.
"운이 좋군. 자네처럼 손기술이 좋고 입이 무거운 사람을 찾고 있었거든. 항구 외곽, 인공 섬 근처에 있는 창고 하나를 관리해줘야겠어."
"창고요?"
"단순한 물류 창고야. 가끔 들어오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관리만 하면 돼. 복잡한 건 싫어하는 것 같으니 딱 그 정도면 되겠지."
사내의 말은 지나치게 정갈했다. 하지만 그 정갈함이 오히려 태석의 신경을 긁었다. '단순한 물류'라는 말은 이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수식어 중 하나였다. 태석은 작업대 위에 놓인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그가 몇 달을 꼬박 일해야 만질 수 있는 액수가 담겨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창고, 내가 왜 맡아야 합니까?"
"자네가 가진 게 오토바이 한 대뿐이라는 건 알고 있네. 이 도시에서 그 정도로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지. 이건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자네 삶에 최소한의 온기를 불어넣어 줄 기회야."
사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강압적인 무게가 실려 있었다. 태석은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에서는 박철수의 경고가 울려 퍼졌지만, 당장 내일의 생계를 위협하는 차가운 빗줄기가 더 현실적이었다. 살아야 했다. 그것이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도덕이었다.
"조건은,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태석의 말에 사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자네는 그저 문을 지키고,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사내가 떠난 뒤, 정비소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석은 홀로 남겨진 작업대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고로 향하는 길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발을 들인 곳이 삶의 경계인지, 아니면 죽음의 문턱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내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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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태석은 배정받은 창고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다. 안개 낀 항구 끝자락, 거대한 철문이 무겁게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창고 내부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고, 천장 높이 쌓인 컨테не러들 사이로 희미한 전등 빛이 일렁였다.
태석은 창고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거대한 공간은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묵직한 압박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구석진 곳을 살피다 발끝에 채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먼지 쌓인 선반 밑, 작은 물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태석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낡은 은색 라이터였다. 불을 붙이려 해보았지만, 뚜껑을 열자마자 낡은 톱니가 맞물리지 않아 헛돌 뿐이었다. 그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으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누군가 급히 두고 간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아주 오래전부터 머물렀던 흔적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멀리서 무거운 트럭의 엔진 소리가 안개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태석은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창고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이 정적을 깨뜨릴 무언가가 도착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