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흩어지는 마지막 문장

기억의 잔해를 줍는 사제 · 약 6분

그의 손끝에서, 그리고 그의 정신에서, 마지막 문장이 바스러져 나갔다. 그 파편은 마치 얼음 결정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안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지우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무아(無我)의 극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의 의식은 찢겨진 종이 조각처럼 파편화되었고, 그 파편들은 성소의 거대한 의지와 뒤섞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성소는 이제 더 이상 포식자의 울부짖음을 내뱉지 않았다. 그것은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잃고 정적에 잠기는 순간의 기묘한 침묵이었다. 기록이 사라질수록 성소의 유기적인 구조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벽면을 타고 흐르던 점액질은 말라붙어 가루가 되었고, 천장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기억의 기둥들은 구조적 지지력을 잃고 기울어졌다. 성소는 이제 존재를 유지할 근거를 잃어가는 거대한 시체와도 같았다.

"스승님... 안 돼요, 이제 그만하세요!"

엘레나의 절규가 들려왔으나, 그것은 이제 성소의 잔향과 섞여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환청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의 시야는 이미 자아의 경계가 무너진 채, 수만 명의 망자가 동시에 쏟아내는 마지막 비명과 간절한 기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 비명들을 하나하나 수렴하고, 그들의 고통이 깃든 문장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그것은 파수꾼으로서의 의무를 넘어선, 한 인간으로서의 지독한 자비였다.

그는 자신의 자아를 연료로 삼아 성소의 포식성을 억제하는 방패가 되었다. 기록이 사라질 때마다 그의 영혼은 그만큼 깎여 나갔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타인의 기억이 주는 안식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소멸시키며 타인의 생애를 구원하는,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이고도 숭고한 거래를 매듭짓고 있었다.

성소의 심장부에서 거대한 붕괴가 시작되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수천 년간 쌓인 기록의 잔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종이와 양피지의 파편이 아니라, 억눌려온 영혼들의 파편이었다. 먼지처럼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은 이안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으나,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고통조차 자아라는 틀이 있어야 느껴지는 것이기에, 그가 자아를 잃어갈수록 세상은 더욱 무디고 고요해졌다.

"이제... 편히 쉬소서."

이안은 마지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은 소리 없는 문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워낸 문장들 속에 갇힌 이들이, 다음 생에서는 이 지옥 같은 기억의 사슬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눈을 뜨기를 기도했다. 그가 지워낸 것은 단순히 글자가 아니라, 그들이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겪어야 했던 영원한 고통의 박제였다.

성소의 거대한 유기체적 벽면이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붕괴했다. 기록이 사라진 성소는 이제 더 이상 기억을 먹고 자라지 못했고, 그을 지탱하던 파수꾼의 자아 또한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 이안은 이제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현대의 기억들, 사서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엘레나와 보냈던 짧은 시간들까지도 이제는 흐릿한 얼룩이 되어 사라져 갔다.

그는 이제 기록의 파수꾼도, 망각의 집행자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모든 기록이 사라진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문장을 지워낸 존재 그 자체였다.

✦ ✦ ✦

성소의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발생했다. 엘레나는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필사적으로 이안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공기와 바스러지는 종이 조각들뿐이었다.

"스승님! 어디 계세요!"

그녀의 외침은 무너지는 성소의 잔해 속에 묻혔다.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성소의 심장부였던 공간은 이제 거대한 공동이 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오직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았다.

엘레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멸망한 성소의 잔해였다. 벽면에는 이제 아무런 문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기록은 지워졌고, 모든 고통은 소멸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잉크가 번져 형체를 알 수 없는 종이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이안이 마지막까지 지켰던, 그리고 마지막에 지워냈던 문장의 파편이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안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성소의 모든 기록과 함께 스스로를 녹여 넣어, 망자들의 고통을 멈추는 문장이 되었다는 것을.

멀리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혹은 성소의 잔해 속에서 들려오는 망자들의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제 그 무엇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이안이 남긴 마지막 흔적, 즉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 찾아온 지독한 정적만을 느꼈다.

성소는 사라졌다. 그곳을 채웠던 지옥 같은 기억의 파도도, 그것을 지키던 사제의 그림자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안이라는 이름은 이제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문장 속에 갇혔고, 그가 지켜낸 이들의 안식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진실이 되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성소의 잔해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차가웠으나, 기묘하게도 평온했다. 그 바람은 흩어진 종이 조각들을 굴려 성소 밖으로 실어 날랐다. 이안이 지워낸 문장들은 이제 세상의 일부가 되어 흩어졌다.

그는 이제 긴 잠에 들었다. 누구도 그를 깨울 수 없고, 누구도 그를 기억할 수 없는 깊은 망각의 끝에서. 그는 자신이 지켜낸 이들이 다음 생에서 평온하게 눈을 뜨기를 바라며, 이제는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밤 속으로 침잠했다.

성소는 사라졌고, 그의 이름은 바람에 흩어져 잊힌 이름이 되었다. 오직 그가 지워낸 문장들만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역사 속에서 영원한 안식으로 남았다.

목차

읽기 설정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