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름 없는 성자의 눈을 뜨다

기억의 잔해를 줍는 사제 · 약 6분

손끝에 닿는 문자는 마치 살아있는 짐승의 피부처럼 뜨겁고도 서늘했다. 이안은 이를 악물며 그 기이한 감각을 받아들였다. 타인의 생애가 쏟아져 들어올 때마다 머릿속은 깨질 듯한 통증으로 가득 찼으나, 그는 그 파편들을 붙잡아 질서 있게 배열해야 했다. 그것은 사서로서의 본능이자, 이 끔찍한 공간에서 그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복의 밑단이 바닥에 끌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소리는 벽에 부딪히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성소는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이곳은 존재 자체가 거대한 침묵의 수렴체였다. 이안은 벽면에 새겨진 문장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것은 신성한 언어라기보다는, 고통에 절규하는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뱉어낸 비명이 응축되어 굳어진 흔적에 가까웠다.

"어떤 것들은... 너무나도 무겁구나."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말은 공기 중에 머물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는 성소의 규칙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이곳은 신의 은총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들이 버리고 간 기억의 잔해들이 썩어 문드러지는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무덤의 관리자, 즉 죽어가는 것들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파수꾼이 된 것이다.

그는 벽면을 따라 걸으며 손가락으로 문자를 훑었다. 문자를 만질 때마다 환영이 쏟아졌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 타오르는 집에서 느껴졌던 열기, 사랑하는 이를 잃고 얼어붙은 눈동자 같은 것들. 그들은 모두 기억의 조각들이었으나, 이 공간에서는 그것들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그의 정신을 할퀴었다. 이안은 숨을 몰아쉬며 그 환영들을 하나하나 문장으로 치환해 나갔다. 그가 기록하지 않으면, 이 기억들은 성소의 벽면에 들러붙어 영원히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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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겁고 습해졌다. 벽면에는 더욱 거대하고 복잡한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스스로 증식하듯 기괴하게 뒤엉켜 있었다. 이안은 그중에서도 유독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한 구역 앞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다른 문장들과는 달리,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의 문자들이 마치 혈관처럼 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망각의 문장'이라 인식했다. 다른 기억들이 누군가의 삶을 증언하는 것이라면, 이 문장들은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힘을 품고 있었다. 문장에 손을 대는 순간, 이안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자기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리는 듯한 아득한 공포가 밀려왔다.

"누구의 것인가, 이 지독한 망각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문장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때, 성소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아까 보았던 그 존재는 이제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마치 그를 지켜보는 관찰자처럼 서 있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렸으나 그 존재의 형체는 여전히 모호했다. 그것은 그림자였으나 동시에 그림자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기록하라. 잊혀지는 것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나, 기록되는 것은 죽음조차 넘어서는 영원이 된다."

그림자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인간의 성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소 자체가 내뱉는 울림이었고, 이안의 뇌리에 직접 박히는 파동이었다. 이안은 직감했다. 이 존재는 그를 돕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파수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함으로써, 성소가 기억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더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이안은 다시 시선을 문자로 돌렸다. 그는 이제 깨달았다. 이곳의 규칙은 단순했다. 기록하는 자는 기록되는 것들과 섞여야 한다. 그는 망자의 기억을 받아 적으며 그들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사제였으나, 그 대가로 자신의 자아를 조금씩 깎아내며 성소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면에 새겨진 망각의 문장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닿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현대에서 책을 사랑했던 사서로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종이의 질감, 서가에 가득했던 고요한 햇살, 그리고 자신이 지키려 했던 수많은 문장들.

그는 그 기억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성소의 벽면에 새겨진 죽어가는 자들의 마지막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손가락 끝에서 배어 나오는 검붉은 액체는 이제 그의 것인지, 아니면 그가 기록하는 망자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성소는 고동쳤다. 기록이 쌓일수록 성소의 벽은 더욱 단단해졌고, 이안의 눈동자는 조금씩 초점을 잃어갔다. 그는 이제 스스로가 누구인지, 이 세계에 오기 전의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가 펜을 쥐듯 문장을 짚어내는 순간마다, 누군가의 지옥 같은 삶이 한 줄의 문장으로 정제되어 이 차가운 벽 위에 박제되었다.

이안은 이제 알았다. 그는 이 성소의 파수꾼이 아니라, 성소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제물이자, 가장 마지막에 남겨질 기록의 일부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기록하는 이 문장들이, 이 지옥 같은 성소에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비릿한 냄새가 폐부를 찔렀지만, 그는 이제 그 냄새가 익숙했다. 그는 망각의 늪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발을 들여놓으며, 아직은 선명한 자신의 이름을 가슴 속에 새겨 넣었다. 아직은, 아직은 잊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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