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기억을 채록하는 밤

기억의 잔해를 줍는 사제 · 약 6분

성소의 벽면은 살아있는 피부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이안은 손가락 끝에 맺힌 검붉은 액체를 닦아낼 여유도 없이, 다음 문장으로 옮겨갔다. 기록은 끊이지 않는 파도와 같았다. 한 존재의 생애가 휘몰아치고 지나가면, 그 잔해는 마르지 않은 잉크처럼 벽면에 스며들었다. 이안은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낚아채어 문장으로 엮어냈다. 그것은 문학적 수사도, 화려한 은유도 아니었다. 오직 죽어가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붙들었던 절박한 진실의 파편들이었다.

"가지 마세요, 제발..."

어느 여인의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 차가운 겨울바다의 파도가 몰아치고, 얼어붙은 손을 잡고 울부짖는 노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타인의 기억이었으나, 이안의 폐부에는 실제의 파도 소리가 울려 퍼졌고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그는 필사적으로 펜촉이 된 손가락을 움직였다. '파도는 할퀴고, 남겨진 자의 비명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환영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하지만 그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성소의 벽에 박혀, 이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장으로 고착되었다.

기록이 반복될수록 이안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감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문득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살던 세상의 하늘이 어떤 색이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생각의 실타래를 붙잡으려 할 때마다, 방금 기록한 타인의 슬픔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현대에서 그가 사랑했던 서늘한 종이의 질감과 고요한 도서관의 공기는 이제 희미한 잔상조차 남지 않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의 이름은... 이안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 말은 허공에서 흩어졌고, 성소는 그 이름을 집어삼켰다.

✦ ✦ ✦

밤이 깊어질수록 성소의 변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안은 벽면을 따라 이동하며 변화를 감지했다. 기록이 쌓일 때마다 성소의 벽면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으며, 그 표면은 마치 근육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록을 보관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을 먹고 자라나는 거대한 유기체였다.

그는 한동안 멈춰 서서 벽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아까 보았던 '망각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존재를 말살하는 공포의 상징이라 여겼으나, 이제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망각의 문장은 삭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소가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기억을 소화시키는 통로였다.

성소는 기억을 먹고 있었다. 사람들의 고통, 환희, 공포, 그리고 그들이 생애 동안 쌓아온 모든 시간의 편린들이 이 거대한 유기체의 세포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인 '망각'이 이안의 자아를 갉아먹고 있었다.

"너는 기록하는 자인가, 아니면 먹히는 자인가."

그림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존재는 성소의 의지 그 자체였다.

"나는... 기록하는 자다."

이안이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성소의 울림을 흉내 내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록은 영원을 만든다. 그러나 기억은 소모되는 것이다. 네가 적어 내려가는 문장들은 성소의 벽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성소는 그 대가로 너의 이름을 지워간다. 이것이 이 성소의 진정한 순환이다."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벽면을 짚었다. 망각의 문장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뇌를 자극했다. 그것은 경고이자 조롱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죽어가는 자들을 배웅하는 파수꾼인 동시에, 그들의 기억을 성소라는 괴물에게 먹이기 위해 배달하는 조력자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문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 진실을 외면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이 성소의 본질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그는 기록을 멈추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수많은 망자의 기억은 그저 썩어가는 잔해로 남아 영원한 고통 속에 방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펜이 된 손가락으로 벽을 긁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 노인의 노년기, 평생을 바쳐 가꾼 밭에서 느꼈던 흙의 온기,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아내의 웃음. 이안은 그 모든 것을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했다.

'흙은 차가웠으나, 그 속에 묻힌 사랑은 온기보다 뜨거웠다.'

문장이 완성되자, 벽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성소의 벽은 더욱 단단해졌고, 이안은 자신의 의식이 한 뼘 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원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망각의 늪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들의 마지막을 붙잡았다. 그가 기록하는 문장들이, 이 지옥 같은 성소에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비릿한 냄새가 다시 폐부를 찔렀지만, 그는 이제 그 냄새조차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는 망각의 파도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발을 들여놓으며, 이제는 희미해진 자신의 이름을 가슴 깊은 곳에 필사적으로 새겨 넣었다. 아직은, 아직은 이 문장들이 그들의 마지막이 되어야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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