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4장: 작은 손의 온기

기억을 굽는 파운드리 · 약 6분

밤은 깊었으나 지훈의 눈은 여전히 충혈되어 있었다. 불을 꺼트린 공장은 낮의 열기를 게걸스럽게 삼켜버린 채, 서늘한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훈은 식지 않은 화덕의 잔열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는 박 노인의 말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타오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불씨'. 그 말은 지훈의 심장 가장 깊은 곳, 차마 녹여내지 못한 채 굳어버린 응어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지훈은 몸을 일으켜 작업대 위의 도구들을 정리하려 했다. 그때, 공장 구석,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거대한 주물 틀 근처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누군가 숨을 죽인 채 무언가를 만지고 있는 듯한 미세한 소리였다. 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유나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둠 속에서 작게 움찔하는 그림자가 보였다. 불빛 하나 없는 공장 안에서 아이는 길을 잃은 듯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지훈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유나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아이는 무릎을 모아 쥐고는 무언가를 아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있었다.

“...삼촌?”

유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지훈은 아이가 혹여 다쳤을까 걱정하며 다가갔으나, 정작 그의 시선을 끈 것은 아이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물체였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지훈이 무뚝가치하게 물으며 몸을 낮췄다. 유나는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품 안의 물건을 놓지는 않았다. 대신 아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펴서 지훈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공장 바닥에 떨어져 있던, 누군가 쓰고 버린 듯한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정교한 모양도, 매끄러운 마감도 없는, 그저 녹슨 철 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나는 그 거칠고 차가운 금속 덩어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차가운 금속의 표면에 닿아, 미세하게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게... 예뻐요.”

유나가 입을 열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냥 철 조각일 뿐이다. 버려진 쓰레기 같은 거야.”

지훈은 무심하게 내뱉었다. 그에게 금속이란 불꽃 속에서 뜨겁게 녹아내려 새로운 형상을 갖추어야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렇게 식어버린 채 녹슨 채로 남겨진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삼촌이 아까 불을 지필 때, 이 조각이 반짝거렸어요. 아주 아주 작게... 반짝요.”

유나는 마치 비밀을 공유하려는 아이처럼 지훈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조각은 따뜻해요. 삼촌 손이 뜨거웠던 것처럼, 이 조각도 삼촌 손을 닮아서 따뜻한 것 같아요.”

지훈은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이의 말은 지훈이 평생 지켜온 논리를 비웃듯, 전혀 다른 차원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금속을 다룰 때 늘 온도를 재고, 불꽃의 세기를 조절했다. 그것은 금속을 정복하고 통제하기 위한 온도의 측정이었다. 하지만 유나가 말하는 온도는 달랐다. 그것은 금속이 품고 있는 기억의 온기이자, 생명체로서 나누는 온기였다.

지훈은 아이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그 작은 조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금속이 아이의 체온을 머금고 아주 미세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는 아까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아버지의 펜던트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남긴 그 서늘한 온기가, 지금 유나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함과 묘하게 겹쳐졌다.

그는 자신이 금속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금속 뒤에 숨어 자신의 감정을 식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은 결코 배신하지 않으며,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견고한 벽이었다. 그러나 유나의 손길은 그 견고한 벽에 아주 작은,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균열을 내고 있었다.

“삼촌, 내가 이거 더 예쁘게 만들어줄까요?”

유나가 갑자기 제안했다. 아이의 눈은 이제 호기심을 넘어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걸 삼촌이 만든 것처럼 아주 멋진 모양으로요. 내가 매일매일 안아주면, 이 조각도 삼스로처럼 뜨거워질 수 있잖아요.”

지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말은 그가 쌓아 올린 고립의 성벽을 아주 가볍게, 그러나 아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아이의 손에 들린 그 작은 조각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다뤄지는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집에 가서 자라. 밤이 너무 깊었다.”

지훈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더욱 차갑게 굴었다. 하지만 유나는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그 작은 금속 조각을 다시 품속 깊이 숨겼다.

“내일 또 올게요, 삼촌. 그때는 제가 이 조각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서 보여줄게요.”

유나는 서윤의 손을 잡고 공장 밖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아이의 발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희미해질 때까지, 지훈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본 작업대 위에는, 유나가 만졌던 자리에 아주 희미한 온기가 머물러 있는 듯했다. 지훈은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차가운 금속이 아닌, 사람의 온기가 닿은 금속의 감촉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유나가 보여준 그 작은 몸짓이, 자신이 지켜온 이 뜨겁고도 고요한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 시작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파도가,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차

P 프롤로그뜨거운 화덕의 열기 속에서 고립을 꿈꾸던 지훈의 평온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1 1장: 식지 않는 불꽃뜨거운 불꽃으로 고립된 세계를 지키던 지훈의 일상에 낯선 침입자가 찾아온다. 2 2장: 파도처럼 밀려온 손님오랜만에 마주한 누나와 그녀가 가져온 낯선 설계도. 3 3장: 녹슨 기억의 파편과거의 상처를 품은 채 공장을 지키려는 지훈과 누나 서윤의 갈등. 4 4장: 작은 손의 온기어둠 속에서 마주한 아이의 온기가 지훈의 견고한 세계를 흔든다. 5 5장: 불꽃 뒤의 그림자재회한 남매의 날 선 대립과 설계도에 담긴 숨겨진 진심. 6 6장: 부서진 궤적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마주한 과거의 파편과 억눌린 진실. 7 7장: 끓어오르는 갈등낡은 설비와 전통을 지키려는 지훈과 현대화를 주장하는 서윤의 격돌. 8 8장: 유나의 선물아이의 온기가 빚어낸 작은 새가 지훈의 차가운 세계를 흔든다. 9 9장: 침전된 진심설계도에 담긴 진심을 마주하며 변화의 문을 열다. 10 10장: 불꽃의 변주상처 입은 작은 새를 다듬으며 삶의 새로운 길을 발견하다. 11 11장: 기억의 복원새로운 공장의 설계를 꿈꾸며 마주한 뜻밖의 유산. 12 12장: 상처의 해소아버지의 유품인 펜던트 속에 숨겨진 진심을 마주하다. 13 13장: 따스한 금속의 온도상처 입은 기억을 녹여 따스한 온기로 빚어내는 삶의 기록. E 에필로그아버지의 유산을 품고 기억을 빚는 공장의 온기.

읽기 설정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