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파도처럼 밀려온 손님
다가오는 실루엣은 점점 선명해졌다. 지훈은 불을 지피던 집게를 내려놓고 작업대 위에 묻은 검은 그을음을 거친 천으로 닦아냈다. 멀리서 걸어오는 이는 한 명이 아니었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성인 여성과, 그 뒤를 짧은 보폭으로 쫓아오는 작은 아이. 도시의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자의 움직임은 정체된 어촌 마을의 공기와는 도저히 섞이지 않는 이질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실루엣이 공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지훈은 심장 언저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지워두었던,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얼굴이었다.
“지훈아.”
공장의 무거운 철문을 밀고 들어온 서윤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단단해져 있었지만, 그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커다란 배낭을 멘 일곱 살 남짓의 여자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공장 안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누나.”
지훈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그리고 밀려오는 서운함이 앞섰다. 그는 눈을 마주치는 대신,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화덕의 불꽃만을 응시했다.
“여전하네. 이 덥고 매캐한 냄새.”
서윤은 코끝을 찡긋거리며 공장 내부를 훑었다. 그녀의 시선은 낡은 기계들과 먼지 쌓인 선반들을 훑고 지나가, 마침내 지훈의 거친 손끝에 머물렀다. 그녀는 지훈이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는 듯, 세련된 가방을 고쳐 메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연락 한 통 없더니, 얼굴 보기도 힘들구나.”
“바빴으니까.”
지훈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그는 누나가 서울에서 성공한 브랜드 디렉터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들었지만, 그것이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만 치부해 왔다. 그 세계의 속도가 이 낡은 공장의 시계와는 결코 맞닿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때, 서윤의 뒤에 서 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아이는 마치 신비로운 동굴을 탐험하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우와, 삼촌! 여기 진짜 뜨거워요!”
아이의 목소리는 쇳물이 끓는 소리처럼 명랑했다. 서윤은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미소를 지었다.
“유나야, 삼촌한테 실례하면 안 돼. 여긴 아주 중요한 곳이란다.”
지훈은 아이의 시선을 피하며 묵묵히 작업대를 정리했다. 유나라고 불린 아이는 삼촌의 차가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장 구석구석을 살피며 작은 손으로 공기 중의 열기를 휘저었다. 그 천진난만한 몸짓이 지훈에게는 낯설고도 위태롭게 느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윤이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금 일적인 열기로 번뜩였다.
“지훈아, 나 그냥 온 거 아니야. 너 혼자 이 고생을 하게 둘 순 없잖아. 이 공장, 이대로 두면 결국 무너져. 이제는 바뀌어야 해.”
서윤은 서류를 펼쳐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지류 위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도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내가 구상한 새로운 공장의 설계도야. 기존의 주물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บ하고, 전시 공간과 체험형 공방을 결합하는 거지. 단순한 제조 공장이 아니라, 브랜딩이 된 공간으로 만드는 거야. 그러면 네가 고생하며 지켜온 이 가업이 훨씬 더 가치 있게 빛날 거야.”
도면 속의 공장은 지훈이 아는 곳이 아니었다. 유리로 된 벽, 세련된 조명, 그리고 깔끔하게 정돈된 작업 공간들. 그것은 뜨거운 쇳물이 튀고 기름때가 배어 있는, 지훈의 삶이 담긴 투박한 요새가 아니었다.
지훈은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검은 선들로 이루어진 그 설계도는 마치 차가운 얼음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이런 거 필요 없어.”
지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건 아버지가 하던 방식이 아니야. 기계로 찍어내는 공장과 다를 게 뭐야.”
“아버지는 옛날 방식이었지만, 세상은 변했어! 너도 알잖아. 이렇게 낡은 방식으로는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걸.”
서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의 말은 옳았지만, 지훈에게는 그 말이 공장의 영혼을 도려내는 칼날처럼 들렸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이 뜨거운 열기가, 누군가의 세련된 기획 아래 박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가라, 누나.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거니까.”
지훈은 차갑게 뱉어내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서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설계도를 꽉 쥐며 지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건 네 고집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야. 너 혼자 이 불꽃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맞붙었다. 그 긴장감 속에서 유나는 삼촌의 작업대 옆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하고는, 홀린 듯 그곳으로 다가갔다. 아이의 작은 손이 상자의 뚜껑을 향해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