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녹슨 기억의 파편
유나의 작은 손이 나무 상자의 뚜껑을 밀어 올리려는 찰나, 지훈은 거칠게 손을 뻗어 상자를 낚아챘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닫혔다. 지훈의 눈빛은 방금 전까지 타오르던 화덕의 불꽃보다 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
낮게 깔린 지훈의 목소리에 유나는 움찔하며 서윤의 뒤로 숨었다. 아이의 눈에 어린 당혹감이 지훈의 가슴 한구석을 따갑게 찔렀지만, 그는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훈아, 애한테 왜 그래? 그냥 호기심에 그런 거잖아.”
서윤이 한숨을 내쉬며 지훈을 나무랐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동생의 무뚝뚝함을 향한 질책과, 동시에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호기심이 문제가 아니야. 여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쁜 놀이터가 아니라고.”
지훈은 상자를 다시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으며 서윤을 쏘아보았다.
“누나가 가져온 그 종이 쪼가리들, 내 눈에는 다 쓰레기로 보여. 아버지가 평생 일궈온 이 공간을, 고작 그런 화려한 그림들로 덮어버리겠다고? 그게 누나가 말하는 가치인가?”
“쓰레기라니! 이건 네가 놓치고 있는 현실이야. 이 낡은 기계들이 언제까지 버텨줄 것 같아? 부모님 사고 이후로 너 혼자 이 공장을 붙들고 버티는 거,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서윤의 입에서 ‘사고’라는 단어가 나오자, 공장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화덕 속의 불꽃이 일렁이며 벽면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마치 그 그림자가 과거의 비극을 형상화한 것처럼 기괴하게 일렁였다.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지훈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를 넘어선, 억눌린 신음처럼 들렸다.
“누나는 서울로 떠나서 다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못 해. 이 공장의 소리, 이 냄새,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방식까지... 누나한테는 그저 낡고 버려야 할 과거일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유일한 삶이야.”
“그 삶이 너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너는 지금 이 불꽃 속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는 거야. 마치 그날처럼!”
서윤의 외침이 공장의 높은 천장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낡은 기계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였다. 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강한 힘이었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고, 그날 이후로 멈춰버린 시간과 함께 지훈은 이 뜨거운 불꽃 뒤로 숨어버렸다. 누나에게는 성공을 향한 도약이 필요했겠지만, 지훈에게는 무너진 세계를 지탱할 유일한 기둥이 필요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무겁고 끈적했다. 공장 구석에서 돌아가던 환풍기가 덜덜거리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끊어진 가족의 유대를 애도하는 통곡처럼 들렸다.
서윤은 지훈의 눈에서 읽히는 깊은 고립감을 마주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이 동생이 왜 이토에 매달려 있는지, 왜 그토록 차가운 금속의 온기에 집착하는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고집이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으로만 보였다.
결국 서윤은 가방을 고쳐 메며 차갑게 돌아섰다.
“내일 다시 올게. 그때는 이 고집이 조금이라도 꺾여 있으면 좋겠구나.”
서윤과 유나가 공장 밖으로 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지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지만, 그것은 이전의 안온한 정적이 아니었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허기진 고독이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화덕의 불을 살폈다. 불길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그 온기가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왠지 모를 공허함에 휩싸여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공장 앞마당의 낡은 담벼락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응시했다.
“이보게, 젊은이. 불꽃이 너무 사나워.”
익숙하고도 해학적인 목소리였다. 지훈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마을의 박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낡은 작업복 차림으로 지훈의 공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 노인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지훈이 짐짓 무심한 척 물었다. 박 노인은 지훈의 표정을 살피더니, 특유의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담벼락 가까이 다가왔다.
“불꽃이 사나운 건 쇳물이 뜨거워서가 아니라, 그 안의 마음이 달궈져서 그런 법이야. 금속은 말이지, 너무 뜨겁게만 달구면 결국 깨지기 마련이지.”
박 노인은 지훈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지훈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사람의 마음도 주물질과 같아서, 때로는 식히고 때로는 다시 녹여야 형상을 잡는 법이야. 자네, 지금 너무 단단하게 굳어버린 것 같아 걱정이네.”
지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조언은 정곡을 찌르는 듯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냥... 지나가다 보였습니다. 불이 잘 붙었나 싶어서요.”
“그래, 불은 잘 붙었지. 그런데 말이야, 불꽃이 아무리 거세도 물 한 바가지면 꺼지는 법이지. 자네가 지키려는 게 진짜 불꽃인지, 아니면 타오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불씨인지 잘 들여다보게나.”
박 노인은 짧은 말을 남기고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훈은 멀어져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위압감을 느꼈다. 노인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혹은 보이지 않는 균열을 예고하는 경고처럼 귓가에 머물렀다.
지훈은 다시 작업대로 돌아와 펜던트가 든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질감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게 느껴졌다. 공장 밖 바다는 여전히 파도를 몰아치며 해안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숨겨둔 이야기를 두드리는 것 같아, 지훈은 차마 불을 끄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