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남해의 바다는 늘 무거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 때면, 바다는 검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듯 깊게 가라앉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은 가끔씩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해안가로 밀려왔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는 마치 오래된 기억이 깎여 나가는 소리 같았다.
그 차가운 파도 소리가 닿지 않는 곳,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낡은 주물 공장에서는 전혀 다른 온도의 숨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덕 안에서 요동치는 불꽃은 밤의 어둠을 가르고 붉은 혈관처럼 꿈틀거렸다.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녹아내리는 금속은 생명체처럼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쇳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는 날카로운 비명 같다가도, 때로는 묵직한 신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열기 속에서 지훈은 자신을 지워가고 있었다.
“뜨겁군.”
지훈이 낮게 읊조렸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은 열기에 데어 금방 증발해 버렸다. 그는 달궈진 금속을 응시했다. 액체가 된 금속은 형체도, 경계도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해진 길 없이 부유하는 사람들의 삶 같기도 했고,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속에서 타들어 가는 감정의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는 쇳물의 온도가 적절히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이 시간만이 유일하게 안온하다고 느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고, 오직 불꽃의 일렁임과 금속의 박동만이 남는 시간. 그 고립된 열기 속에서만 지훈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지켜온 이 뜨거운 벽이, 언젠가 예기치 못한 파도에 의해 무너져 내릴 것임을. 차가운 바닷물이 불꽃을 덮치듯, 잊고 지냈던 삶의 조각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