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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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굽는 파운드리 · 약 2분

남해의 바다는 늘 무거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 때면, 바다는 검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듯 깊게 가라앉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은 가끔씩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해안가로 밀려왔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는 마치 오래된 기억이 깎여 나가는 소리 같았다.

그 차가운 파도 소리가 닿지 않는 곳,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낡은 주물 공장에서는 전혀 다른 온도의 숨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덕 안에서 요동치는 불꽃은 밤의 어둠을 가르고 붉은 혈관처럼 꿈틀거렸다.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녹아내리는 금속은 생명체처럼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쇳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는 날카로운 비명 같다가도, 때로는 묵직한 신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열기 속에서 지훈은 자신을 지워가고 있었다.

“뜨겁군.”

지훈이 낮게 읊조렸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은 열기에 데어 금방 증발해 버렸다. 그는 달궈진 금속을 응시했다. 액체가 된 금속은 형체도, 경계도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해진 길 없이 부유하는 사람들의 삶 같기도 했고,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속에서 타들어 가는 감정의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는 쇳물의 온도가 적절히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이 시간만이 유일하게 안온하다고 느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고, 오직 불꽃의 일렁임과 금속의 박동만이 남는 시간. 그 고립된 열기 속에서만 지훈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지켜온 이 뜨거운 벽이, 언젠가 예기치 못한 파도에 의해 무너져 내릴 것임을. 차가운 바닷물이 불꽃을 덮치듯, 잊고 지냈던 삶의 조각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목차

P 프롤로그뜨거운 화덕의 열기 속에서 고립을 꿈꾸던 지훈의 평온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1 1장: 식지 않는 불꽃뜨거운 불꽃으로 고립된 세계를 지키던 지훈의 일상에 낯선 침입자가 찾아온다. 2 2장: 파도처럼 밀려온 손님오랜만에 마주한 누나와 그녀가 가져온 낯선 설계도. 3 3장: 녹슨 기억의 파편과거의 상처를 품은 채 공장을 지키려는 지훈과 누나 서윤의 갈등. 4 4장: 작은 손의 온기어둠 속에서 마주한 아이의 온기가 지훈의 견고한 세계를 흔든다. 5 5장: 불꽃 뒤의 그림자재회한 남매의 날 선 대립과 설계도에 담긴 숨겨진 진심. 6 6장: 부서진 궤적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마주한 과거의 파편과 억눌린 진실. 7 7장: 끓어오르는 갈등낡은 설비와 전통을 지키려는 지훈과 현대화를 주장하는 서윤의 격돌. 8 8장: 유나의 선물아이의 온기가 빚어낸 작은 새가 지훈의 차가운 세계를 흔든다. 9 9장: 침전된 진심설계도에 담긴 진심을 마주하며 변화의 문을 열다. 10 10장: 불꽃의 변주상처 입은 작은 새를 다듬으며 삶의 새로운 길을 발견하다. 11 11장: 기억의 복원새로운 공장의 설계를 꿈꾸며 마주한 뜻밖의 유산. 12 12장: 상처의 해소아버지의 유품인 펜던트 속에 숨겨진 진심을 마주하다. 13 13장: 따스한 금속의 온도상처 입은 기억을 녹여 따스한 온기로 빚어내는 삶의 기록. E 에필로그아버지의 유산을 품고 기억을 빚는 공장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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