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늘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태양이 남기고 간 마지막 온기가 대기 속에서 얼어붙어, 세상은 거대한 은백색 무덤이 되었다. 눈송이는 생명의 온기를 품지 못한 채 날카로운 칼날처럼 허공을 유영하다 지면에 닿기도 전에 얼음 결정으로 부서졌다. 침묵만이 지배하는 이 백야의 시대에, 살아있다는 증거는 오직 가쁜 숨결과 살을 에듯 파고드는 추위뿐이었다.
그 지독한 냉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박동하는 심장이 있었다. 거대한 뿌리가 대지를 움켜쥐고, 줄기마다 뜨거운 맥동을 내뿜는 심장 나무. 그것은 신의 유해이자 인류가 매달릴 수 있는 마지막 구원이었다. 나무가 내뿜는 열기는 안개처럼 피어올라 거주구의 사람들을 감싸 안았고, 그 온기에 기대어 사람들은 내일이라는 이름의 불확실한 기도를 올렸다.
서윤은 나무의 밑동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그것은 대지의 맥박이자, 나무가 세상에 건네는 가느다란 숨결이었다. 평소라면 규칙적이고 묵직하게 전해졌을 그 고동이, 오늘따라 어딘가 위태로웠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의 몽롱한 꿈처럼, 혹은 서서히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떨림처럼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서윤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나무의 온기는 여전히 따스했지만, 기록자로서 그녀의 감각은 아주 미세한 균열을 포착하고 있었다. 거대한 생명이 스스로를 깎아내며 내보내는 온기가,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것은 재앙의 전조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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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울부짖었다. 얼어붙은 폐허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바람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서윤은 두꺼운 가죽 옷을 여미며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눈 덮인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고요한 세계의 정적을 깨뜨렸다.
나무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공기는 더욱 희박해졌고, 열기는 피부를 태울 듯 강렬해졌다. 하지만 그 뜨거움은 생명력이 넘치는 활기가 아니라, 소멸을 앞둔 존재가 마지막으로 내뿜는 비명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나무의 결을 따라 손을 움직이며, 이 거대한 생명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읽어내려 애썼다.
그때였다. 나무의 깊은 골짜기, 이끼조차 얼어붙은 그 그늘진 틈새에서 이질적인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나무의 열기와는 다른, 서늘하면서도 신비로운 푸른 빛이었다. 서윤의 시선이 그 빛에 머무는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 이 세계의 질서가, 그녀가 평생을 바쳐 기록해온 이 평온한 균형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