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침식되는 정의

유언의 무게 · 약 7분

서진은 책상 위에 놓인 아버지의 약병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이 지옥 같은 진실을 혼자 감내하며 죽어갔지만, 이제는 그가 그 짐을 이어받아 끝까지 파헤쳐야 했다. 그는 펜을 들어 기록을 시작했다. 이제는 방어적인 변호사가 아닌, 진실을 끄집어내는 추적자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이 어디까지 닿을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서진은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는 가문의 법무팀 내부망을 통해 확보한 신성동 개발 당시의 설계도와 현재의 실측 데이터를 겹쳐놓았다. 화면 위로 붉게 표시된 불일치 지점들이 마치 찢어진 상처처럼 드러났다. 특히 지하 상가 구역의 특정 지점에서, 설계도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실제 공사 당시에는 대규모 콘크리트 타설이 이루어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 지점이 단순한 창고가 아님을 직감했다. 외부와의 연결 통로가 의도적으로 차단된 구조, 그리고 공기 순환이 최소화된 폐쇄적인 공간. 그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은닉 장소였다. 혹은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진의 손끝이 떨렸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매일 밤 죄책감에 시달리며 약에 의존해야 했던 것일까.

그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 조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가문의 그림자는 이미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서진은 신성동 부지 근처에 위치한 현재의 쇼핑몰 지하 관리실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가문의 공식적인 조사 업무라는 명분 하에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법적 허점을 찾는 변호사의 그것이 아니라 범죄의 흔적을 쫓는 수사관의 그것에 가까웠다.

"여기 지하 3층 끝부분, 벽면이 비정상적으로 두껍게 처리되어 있네요."

서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벽면을 두드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변호사님, 너무 깊게 파고드는 건 위험합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문의 핵심 법무팀 실무를 담당하던 이 과장이 서 있었다. 서진과 함께 밤샘 업무를 하며 동료애를 쌓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은 동료의 것이 아니라, 방관자의 것이었다.

"이 과장, 당신도 알고 있었나? 이 공간이 설계도에 없는 공간이라는 걸."

서진의 질문에 이 과장의 표정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회사의 자산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자산이 어떻게 유지되느냐는 거죠."

"자산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었어. 이 공간이 무엇을 은폐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당신도 이 방관의 공범이 되는 거야."

서진의 일갈에 이 과장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범이라니요. 우리는 그저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일 뿐입니다. 당신처럼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결국 시스템에 잡아먹히게 되어 있어요."

이 과장은 그 말을 남기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서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장 믿었던 동료마저 시스템의 논리에 굴복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는 다시 벽면으로 돌아왔다. 그는 가문의 보안 시스템 허점을 이용해 내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두었지만, 지금은 그 기술적인 허점보다 인간의 배신이 더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 그는 벽면의 틈새를 살피며, 과거 이 공간이 무엇을 은닉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손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벽을 긁어내렸다.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며 숨을 죽였다.

"서진아, 아직도 그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니?"

윤서연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로 다가와 서진의 곁에 섰다. 그녀의 시선은 서진이 긁어낸 벽면의 흔적에 머물렀다.

"이곳은 위험한 곳이야. 네가 찾는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 네가 누려온 모든 것—네 이름, 네 지위, 네가 가진 모든 권리—이 증발해버릴 거야."

서진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럼 증발하게 둬. 가짜로 세워진 성벽보다 차라리 무너진 진실이 낫다."

"네가 말하는 진실이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니? 아니, 네가 보려는 건 그저 과거의 파편일 뿐이야. 하지만 그 파편을 건드리는 순간, 너는 우리 가문이 쌓아온 모든 것과 전쟁을 벌여야 해.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윤서연은 서진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그 내용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너는 변호사야. 법의 논리를 믿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지금 네가 하려는 건 법을 넘어서는 일이야. 이건 정의가 아니라, 파멸을 향한 투신이지."

서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파멸이라... 이미 파멸은 시작됐어, 누나. 아버지가 매일 밤 썼던 그 장부 속에서, 그리고 이 지하 공간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비명 속에서 이미 시작됐어. 나는 그저 그 비명을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윤서연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확인해봐. 하지만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네가 책임져야 할 거야."

그녀는 서진을 지나쳐 떠났다. 서진은 홀로 남겨진 지하 공간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벽면의 틈새는 마치 입을 벌린 거대한 구멍처럼 보였다. 그는 직감했다. 이 공간이 단순한 은닉 장소가 아니라, 가문의 추악한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거대한 공동묘지였다는 사실을.

그는 다시 펜을 꺼내 기록했다. 이제는 법적 리스크를 따지는 변호사의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악의 실체를 하나하나 도려내는, 처참한 고발의 기록이었다. 법과 자본이 뒤엉킨 이 거대한 성벽 앞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이 깎여 나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가 멈추는 순간, 아버지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기록했던 그들의 죽음은 영원히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화려한 조명도, 사람들의 환호도 없는 지하의 정적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증명할 유일한 길을 찾고 있었다. 그 길은 아마도 가장 고통스러운 파멸의 길일지도 몰랐다.

목차

읽기 설정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