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안개 속의 윤슬 베이커리

기억을 굽는 빵집의 유령들 · 약 5분

은서는 문가에 선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짙은 코트 차림의 사내 혹은 여인인지 분간이 어려운 형체가 서 있었다. 안개에 젖은 외투에서는 차가운 습기와 함께, 오래된 종이와 마른 꽃잎이 섞인 듯한 쓸쓸한 향취가 배어 나왔다. 은서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회중시계를 응시했다. 시계의 표면은 세월의 때가 묻어 검게 변색되어 있었으나, 그 위를 흐르는 기묘한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것은 누군가 간절히 붙잡고 싶어 했던, 혹은 필사적으로 놓아버리려 했던 기억의 잔류였다.

“이 시계에 깃든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굽고 싶어 하는 것은 당신의 과거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잃어버린 누군가의 흔적입니까?”

은서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예리하게 파고드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의뢰인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빵집 내부의 공기는 더욱 밀도 있게 가라앉았다.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그저... 이 시간이 멈추는 것이 두려워서요. 이 시계가 멈춘 순간부터, 제 세상도 멈춰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땅처럼 메말라 있었다. 은서는 그가 내뱉은 말속에서 짙은 비릿함과 애상 어린 향기를 포착했다. 그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도려내어 버린 기억이 남긴 흉터였다. 은서는 가운 소매를 끌어올려 하얀 밀가루가 묻은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그때, 은서의 손등에 새겨진 희미한 화상 자국이 화덕의 잔열을 머금은 듯 옅은 분홍빛으로 도드라졌다. 그것은 그녀가 타인의 기억을 정제하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치러온, 보이지 않는 훈장이자 상처였다.

“기억은 때로 너무 무거워서 스스로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밀어내기만 하면, 공백은 더 큰 통증으로 돌아오지요. 당신이 가져오신 이 시계가 말하는 시간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잊었습니까?”

의뢰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은서는 그가 가져온 물건이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이 깃든 매개체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편에 놓인 커다란 화덕을 가리켰다.

“이 시계가 품고 있는 기억의 향기를 제가 맡아보겠습니다. 우선은 그 기억이 어떤 맛과 향을 품고 있는지, 그 실체를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준비한 빵 속에 그 기억을 녹여낼 수 있을지 확인해보죠.”

은서는 의뢰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시계의 태엽 장치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기운을 쫓고 있었다. 그녀는 의뢰인이 물러난 뒤, 홀로 남겨진 시계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으나, 그 내부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마치 누군가의 심박수처럼 불규칙하고도 절박했다.

✦ ✦ ✦

의뢰인이 떠난 후, 빵집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은서는 화덕의 불을 낮추고, 시계가 놓여 있던 자리에 가루를 뿌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입자들을 감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억이 물리적인 향기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코끝을 스치는 것은 차가운 새벽 안개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짓이겨진 꽃잎과 젖은 흙,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웃음소리 같은 파동이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급하게 닫아버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혹은 잊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잔상 같기도 했다.

‘너무나도 아픈 향기야.’

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계는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려는 의지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 이 시간대를 봉인하려 했던 흔적이 느껴졌다. 은서는 손등의 화상 자국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자신은 타인의 슬픔을 빵으로 굽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만, 때로는 타인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여 자신을 집어삼키려 할 때가 있다.

그녀는 시계의 덮개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종이 조각 하나가 말려 있었다. 종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비뚤비뚤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내는 절박한 구조신호이자,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세운 벽이었다.

은서는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글자마다 배어 있는 것은 지독하게도 아름답고도 아픈 향기였다. 그것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망각의 의지였으나, 동시에 그 망각이 가져온 비극적인 공백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빵집 문밖에서 다시 한번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망설임 없는, 그러나 지극히 조심스러운 발소리였다. 은서는 시계를 내려놓고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고, 윤슬 베이커리의 화덕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누군가의 잃어버린 시간이 고여 있었다.

목차

P 프롤로그망각의 기억을 굽는 베이커리에서 시작된 기묘한 의뢰. 1 안개 속의 윤슬 베이커리기억의 향기를 굽는 빵집에서 마주한 멈춰버린 시간의 흔적. 2 멈춰버린 회중시계멈춰버린 시계 속에 박제된 비극적 기억을 추적하는 여정. 3 밀가루 속에 섞인 눈물기억의 반죽 속에 봉인된 푸른 실과 비극적인 진실의 실마리. 4 기억의 향기, 첫 번째 문장빵 속에 새겨진 비극적인 망각의 문장을 추적하며 진실을 마주한다. 5 그림자 속의 관찰자기억을 굽는 빵집에서 마주한 은밀한 기록과 집착의 흔적. 6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공동체의 망각 속에 숨겨진 비극의 조각을 찾아 나서는 여정. 7 왜곡된 기억의 조각자신을 가둔 기억의 감옥 속에서 마주한 수연의 처절한 그림자. 8 지워진 흔적의 추적자신을 가둔 문 너머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다. 9 집착의 실체비극의 파편을 봉인하려는 최태준의 경고와 은서의 위험한 선택. 10 기억의 무게고통으로 빚어낸 빵 속에 박힌 기억의 파편을 마주하다. 11 가려진 진실의 조각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가둔 수연의 고립된 기억 속으로 들어선다. 12 무너지는 경계망각을 강요하는 집착과 수연이 지켜낸 진실 사이에서 마주한 고통의 조각들. 13 망각의 의지망각의 방벽 뒤에 숨겨진 수연의 처절하고도 숭고한 자기방어. 14 폭풍 전야의 베이커리파괴와 보존 사이의 갈등 속에서 마주한 진실의 파편. 15 절정: 기억의 용광로망각의 재로 덮으려 했던 기억 속에서 마주한 지독하고도 숭고한 사랑의 진실. 16 수연의 이름고통의 기억을 굽어낸 온기 속에서 마주한 진실의 문. 17 망각이 아닌 기억의 승화빵 속에 새겨진 고통스러운 기억을 넘어, 은서는 마침내 진실의 문을 향해 나아간다. 18 다시 열리는 문아픈 기억을 굽는 온기로 바꾸어, 잊힌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성소의 시작. E 에필로그아픈 기억을 굽는 온기로 승화시켜 타인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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