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엇갈리는 마음의 온도
오븐의 열기가 주방을 채우고 있었지만, 서윤의 머릿속은 민준이 건넨 서류의 서늘한 문장들로 가득했다. '보존 가치가 없는 노후 구조물'. 그 잔인한 낙인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 같아 가슴이 저릿했다. 그녀는 식어가는 밀가루 반죽을 바라보며, 이 작은 공간을 지탱해온 시간이 고작 종이 한 장의 문구로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서윤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민준의 공방 근데에서 들려오던 휘파람 소리는 어느덧 잦아들어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아직 나무를 다듬고 있을 것이라 믿으며, 그의 공방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민준 씨, 잠깐만요!"
공방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민준은 톱질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눈빛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윤은 숨을 고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 말씀하신 그 조항들 말이에요. 그들이 정말로 이 빵집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건가요? 우리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가요?"
서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민준의 눈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그가 가진 기록의 힘이, 그가 가진 이 단단한 나무의 질감이 이 거대한 흐에는 맞설 수 있는 방패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도와주세요, 민준 씨.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 당신이 기록해온 것들이 이 빵집을 증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할머니의 노래가, 이 마을의 역사가 이 건물 안에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하면 보여줄 수 있을까요?"
서윤은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민준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차가웠다. 그는 손에 든 나무토막을 작업대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서윤의 심장을 때렸다.
"서윤 씨,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민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윤의 말을 베어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역사'나 '노래'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건설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수익과 매끄러운 도로, 그리고 현대적인 건물뿐입니다. 그들에게 이 낡은 목조 가옥은 그저 철거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빵을 구워도, 그들이 법적인 서류를 들이밀며 밀어붙이면 당신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 하잖아요!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게 둘 수는 없잖아요!"
"방법이라니요?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설계한 판 위에서, 개인의 감정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그 연구, 그 푸른 가루의 실험... 그것이 이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그건 희망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민준의 시선은 서윤을 향해 있었지만, 마치 그녀를 지나쳐 먼 바다 너머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차갑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했다.
"지키고 싶다면, 차라리 일찍 내려놓는 법을 배우세요. 그래야 나중에 덜 아플 겁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무를 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듯한 단호한 태도였다. 서윤은 그 자리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민준이 말하는 '현실'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차갑고, 딱딱하며, 사람의 온기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숫자의 세계였다.
✦ ✦ ✦
민준의 공방을 빠져나온 서윤의 발걸음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유난히 외롭고 작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몸짓이었는지, 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온 서윤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주방 식탁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고립감은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의 온몸을 적셨다다. 서울에서의 실패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쳐온 이곳에서도,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패배자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다 틀렸어..."
서윤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물이 뜨겁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레시피 북, 푸른 유리병의 신비로움, 민준과의 짧았던 교감...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이 그저 꿈이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한참을 흐느끼던 서윤은 문득, 눈물로 젖은 눈을 들어 주방 한편에 놓인 레시피 북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 책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고요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책을 펼쳤다.
무거운 슬픔 속에서, 그녀의 시선은 아까 보았던 '시간의 무게'에 관한 문장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글씨체는 단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재료의 무게는 시간이 결정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완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윤은 홀린 듯 푸른 유리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가루를 한 꼬집 떠서 손바닥에 올리자, 그 차가운 촉감이 슬픔에 젖은 그녀의 피부를 자극했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할머니가 남긴 이 빈 페이지들은, 단순히 무언가를 적어 넣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련이 닥쳤을 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길어 올려야 할 '마지막 재료'가 무엇인지를 묻는 과정이었다.
서윤은 눈물을 닦아냈다. 여전히 가슴은 아리고 세상은 적대적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아주 작은 불씨 같은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레시피 북의 맨 뒷장,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곳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 빵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조각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푸른 가루를 더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맛의 농도를 결정짓는, 아주 근원적인 무언가였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밀가루 포대를 열었다. 오늘 밤, 그녀는 이 슬픔을 반죽에 섞어 넣기로 했다. 이 고통이 어떻게 맛으로 변할 수 있을지, 할머니가 남긴 그 마지막 비밀이 무엇인지 찾아내야만 했다.
창밖의 바다는 여전히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는 듯했다. 서윤은 오븐의 불을 켰다. 노란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