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불청객의 그림자
새벽의 푸른 빛이 물러가고 노란 햇살이 창가에 내려앉을 때쯤, 서윤은 밀가루 가루가 뽀얗게 내려앉은 조리대를 닦아내고 있었다. 어제의 긴장된 대화와 민준의 따뜻한 여운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오늘 구워낼 빵의 배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할머니가 남긴 '기억의 빵'에 대한 화두를 곱씹었다. 평화로운 파도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일상의 리듬. 그것이 서윤이 간신히 붙잡은 삶의 궤도였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예기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으로 인해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평소와는 다른 이질적인 공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커다란 트럭들과 그 주변을 서성이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 늘 고즈넉하던 해안도로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생경한 속도의 소음이 섞여 있었다. 서윤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게 앞을 정리했다.
"서윤아! 너 왔니?"
멀리서 정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평소의 활기찬 발걸음이라기에는 어딘가 불안함이 섞인, 숨 가쁜 움직임이었다.
"정자 할머니, 무슨 일이세요?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하세요?"
"아이고, 말도 마라. 저기 저 사람들 보여? 저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다 뒤엎어 놓겠다고 난리란다. 재개발인지 뭔지 하는 거 있잖니. 저기 저 양복 입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이 동네를 훑고 다녀!"
정자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빵집 건물을 유심히 살피며 주변을 서성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세련되었지만 차가운 느낌을 주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달빛 마을의 고요한 풍경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서울에서 보았던, 성과와 효율만을 따지던 그 차가운 사무실의 풍경이 이곳까지 따라온 것만 같아 두려움이 엄습했다.
✦ ✦ ✦
남자는 서윤이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정확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우면서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이곳이 '달빛 제과'인가요?"
남자의 목소리는 매끄러웠지만, 그 안에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서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가게의 외벽과 지붕을 훑어 내렸다.
"한서윤 씨 되시죠? 저는 '해안 개발'의 최강석 팀장이라고 합니다."
"저를 어떻게 아시죠?"
서윤의 물음에 강석은 가볍게 미소 지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품 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 근처 땅을 조사하던 중이었습니다. 이 건물이 이 마을에서 꽤 오래된 목조 가옥이라, 가치가 조금 떨어져 보이긴 합니다만... 위치는 아주 좋습니다. 재개발 계획이 확정되면 이 일대가 아주 근사한 휴양지로 바뀔 거거든요."
그는 서류를 펼쳐 서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것은 단순한 서류가 아니었다. 지도가 그려진 커다란 종이 위에는, 서윤이 살고 있는 빵집을 포함한 마을 전체의 구획이 자로 잰 듯 정교하게 나뉘어 있었다. 붉은 선들이 마을의 골목골목을 가로지르고, 서윤의 빵집이 있는 자리는 마치 정복해야 할 영토처럼 표시되어 있었다.
"이게... 뭐죠?"
"땅의 경계선입니다. 당신이 지키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앞으로 어떤 거대한 흐름 속에 놓이게 될지를 보여주는 지도죠."
강석은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그 손가락 끝이 서윤의 빵집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누르고 있었다. 그 순간, 서윤은 자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지도는 정교했지만, 그 속에는 사람의 온기나 세월의 흔적 따위는 배제된 채 오직 숫자로 환산된 경제적 가치만이 가득했다.
"이곳은 단순히 건물이 아닙니다. 할머니가 남기신 소중한 터예요. 마음대로 말씀하실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서윤의 목씨가 떨렸지만, 그녀는 애써 강단 있게 말을 이었다. 강석은 그런 서윤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감정적인 접근은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이 마을도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어요. 조만간 공식적인 제안이 갈 겁니다. 그때는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차가운 먼지 냄새만이 남았다. 서윤은 그가 떠난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도가 그려진 서류의 붉은 선들이 마치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밧줄처럼 느껴졌다.
✦ ✦ ✦
강석이 떠나고 난 뒤, 마을은 이전보다 훨씬 더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정자는 한참 동안 서윤의 손을 꼭 잡고 걱정스러운 말을 늘어놓았지만, 서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와 오븐 옆의 푸른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의 소란스러운 소음과 차가운 지도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탓인지, 유리병 속의 푸른 빛이 평소보다 더욱 신비롭고도 위태롭게 일렁이는 듯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이제 그 푸른 빛은 더 이상 평화롭게만 보이지 않았다. 저 너머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아름다운 풍경을 앗아가는 거대한 해일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레시피 북을 펼쳤다. 빈 페이지들이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남긴 이 기록들이, 어쩌면 이 거대한 흐름을 막아낼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서둘러 밀가루를 꺼냈다.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손끝에서 시작되는 이 익숙한 노동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밀가루의 촉감은 평소보다 차갑고, 마음속의 소란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