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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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굽는 오븐과 그림자 조각 · 약 3분

안개는 마을의 가장 낮은 곳부터 차오르는 하얀 숨결 같았다. 그 속에 파묻힌 집들은 마치 세상에서 지워진 존재처럼 희미하게 일렁였고, 오직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빵집만이 은은한 황금빛 등불을 밝히며 서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으나, 빵집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향기는 기묘하게도 사람의 체온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갓 구워낸 빵의 고소함이기도 했고, 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섞인 냄새이기도 했다.

루나는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며 차가운 바닥을 밟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예전에는 골목마다 울려 퍼지던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외침이, 이제는 안개 속에 갇힌 메아리처럼 희미해졌다. 루나는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 소중한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루나야, 오늘 가져온 기억들은 유독 시린 색을 띠고 있구나."

바르도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주름진 손으로 말랑한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가 만지는 것은 밀가루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밤새 흘려보낸 슬픔의 파편들이었다. 루나는 그가 반죽을 치댈 때마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미세한 가루를 보았다. 그것은 기억이 빵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부수는 소리였다.

"할아버지, 왜 사람들은 자꾸 기억을 버리는 걸까요? 슬픈 기억만 버리면 마음이 가벼워질 텐데, 왜 가끔은 마을이 너무 조용해지는 것 같죠?"

루나의 물음에 바르도는 대답 대신 가마솥의 불을 조절했다. 가마 속에서는 기억들이 타오르며 투명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바르도의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었으나, 그는 그 슬픔을 빵 속에 숨기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장인이었다.

"기억은 무게를 지닌 보석과 같단다. 그것을 버리면 몸은 가벼워지겠지만, 네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안개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빵집의 유리창을 세차게 때렸다. 그것은 바람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의지가 담긴 서늘한 손길 같았다. 루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마을의 색채를 조금씩 갉아먹는 무채색의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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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의 문이 닫히고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루나는 오늘 본 바르도의 쓸쓸한 표정과, 점점 희미해져 가는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억이 빵이 되어 사라질 때마다, 마을의 색깔은 한 층씩 옅어지고 있었다. 루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빵집 깊은 곳에서 무엇이 자라나고 있는지, 그리고 누군가가 그 기억들을 노려 무채색의 세상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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