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균열의 전조

상사와의 비밀스러운 동거: 혐관의 온도 · 약 7분

창밖의 정적은 깊었으나, 그 정적을 채우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명이었다. 도윤은 책상 위에 놓인 그 메모를 다시 한번 응시했다. [결점 없는 완벽함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다. 감정을 배제하라.] 그것은 스스로에게 가했던 가혹한 형벌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문장이 가진 위압적인 힘이 힘을 잃은 듯 보였다. 연우는 그가 그 문장을 가리는 손길에서, 자신을 향한 배려 혹은 방어의 의지를 읽어냈다.

하지만 그 평온한 균열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회사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그들이 공유했던 온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사무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거웠고, 복도를 지나는 직원들의 표정에는 비정상적인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전략기획팀의 책상은 분주하게 돌아갔으나, 그 소음은 활기가 아닌 불안을 증폭시키는 마찰음에 가까웠다. 연우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사직서가 든 가방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직은 꺼내지 않았지만,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준비를 마친 그 가방은 그녀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이번 구조조정은 단순한 인력 감축이 아닙니다. 성과를 증명하지 못하는 부서 전체를 도려내는 작업이죠.”

인사팀의 정보원인 하은이 연우의 옆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눈은 연우의 표정을 살피며 긴박하게 움직였다.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모니터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팀장실의 문이 열리고 도윤이 걸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완벽하게 다림질된 수트 차림이었고,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연우는 보았다. 그의 눈 밑에 드리워진 깊은 그림자와, 그가 쥐고 있는 서류 뭉치를 너무 세게 쥐어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을.

회의실에 들어선 도윤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성과를 발표하며 날카로운 논리로 질의를 방어해 나갔다. 하지만 그가 발표를 이어갈수록, 회의실 한쪽 끝에 앉은 강태준 실장의 비열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강태준은 도윤의 완벽함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그가 쌓아 올린 성벽이 언제 무너질지를 지켜보는 포식자와 같은 태도로 그를 압박했다.

“팀장님, 실력은 인정합니다만. 이번 구조조정의 핵심은 효율입니다. 과도한 리소스 투입이 낭비로 이어지는 부분은 쳐내야죠. 특히 팀 내에서 업무 비중이 낮은 사원들의 배치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강태준의 말에 도윤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것은 명백한 공격이었다.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연우는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도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효율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전략의 핵심은 인적 자원의 유기적 결합에 있습니다. 사원들의 업무 비중은 제가 판단할 영역입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연우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방어막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어막은 자신을 포함한 팀원 전체를 밀어내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도윤은 연우를 따로 불렀다. 그의 집무실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연우 사원. 이번 구조조정 발표를 보셨겠지만, 조직의 생존을 위해선 냉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도윤은 연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은 어젯밤 집에서 보여주었던 온기 어린 시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공적인, 아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는 차가운 벽이었다.

“당신의 업무 성과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데이터 분석의 깊이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당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연우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어젯밤 함께 요리를 하며 나누었던 대화들, 그가 보여주었던 약점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찰나의 미소들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는 지금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과 얽힌 모든 것을 끊어내기 위해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부분을 보완하면 좋을까요?”

연우는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는 그가 지금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밀어냄으로써 그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 성벽 안으로 숨어들려 하고 있었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만 남기세요. 불필요한 감정이나 의존은 독이 됩니다.”

도윤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연우를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연우는 그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불필요한 감정’ 속에 자신과 공유했던 그 밤의 온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지금 스스로를 파괴하며 세우고 있는 성벽이 얼마나 높고 차가운지를.

연우는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가방을 보았다. 사직서가 든 가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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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나온 연우는 복도를 걸으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강태준이 던진 말들은 여전히 귀에 웅웅거렸다. 구조조정의 핵심 인물, 그리고 도윤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 날카로운 칼날들.

그녀는 도윤의 차가운 태도가 자신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공포였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무너져가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그는 가장 익숙한 방식인 ‘배제’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을 밀어내며 스스로를 가두는 성벽을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있었다.

연우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도윤의 이름이 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전화를 걸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선택한 고독의 무게를 견뎌낼 시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직감했다. 이 차가운 벽이 계속될수록, 그 성벽은 더 빨리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성벽이 무너질 때, 그 안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연우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에는 차가운 데이터들이 흐르고 있었고, 복도 너머에서는 여전히 구조조정의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윤이 그어놓은 선은 명확했고, 그 선 너머에는 차가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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