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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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서고 · 약 3분

한양의 저녁은 늘 짙은 침묵과 함께 찾아왔다. 사람들은 저녁 노을이 지면 하루의 기억을 의복의 소매에 묻거나, 품속에 숨겨둔 향료 주머니에 쏟아부었다. 그것은 문자가 사라진 시대의 생존 방식이었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휘발되고, 붙잡아두지 못한 기억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향취가 되어 도시의 골목마다 자욱하게 깔렸다. 사람들은 아침에 깨어 서로의 이름을 묻고, 점심에 나누어 먹은 음식의 맛을 공유하며, 저녁이 되면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을 지워나갔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도시는 화려한 단청과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으나, 그 속은 텅 빈 껍데기처럼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서윤은 그 공허한 소음 속에서 홀로 고립된 섬처럼 서 있었다. 그는 기록관이라는 직함을 가졌으나, 그가 기록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잔상뿐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와 "어머니의 손등에서 나던 분꽃 향기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그는 그 향기가 불러일으키는 희미한 잔상을 종이 위에 기하학적인 곡선으로 옮겨 그렸다. 하지만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묘사에 불과했다. 종이는 기억을 붙잡아두지 못했고, 사람들은 기록이 아닌 향기의 농도로 과거를 재구성했다. 서윤은 매일 밤 자신의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이토록 차가운 이유를 자문했다.

"기억이 향기로만 남는다면, 그 기억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 것일까."

서윤이 나직이 읊조린 말은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문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감각의 파편만이 남았고, 그 파편들은 매 순간 증발하며 사람들의 자아를 갉아먹었다. 그가 수집하는 것은 이제 사라져가는 것들의 잔해였으며, 그가 지키려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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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가장 깊은 곳,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금지된 구역에는 오래된 서고가 있었다. 그곳은 망각의 질서 아래 봉인된 장소였으나, 서윤은 그곳에서만은 기묘한 온기를 느꼈다. 다른 곳이 향기로 가득 찬 공허함이라면, 이곳은 억눌린 침묵이 응축된 무게로 가득 차 있었다. 서윤은 숨을 죽인 채 서고의 문을 밀었다.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 사이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그것은 향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무언가 단단한 의지를 가진 형태였다.

그는 손전등도 없는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부드러운 촉각이 아니라, 마치 뼈처럼 딱딱하고도 매끄러운 표면이었다.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향기로 전승되는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획(劃)과 점(點)으로 이루어진, 차갑고도 명징한 무언가의 흔적이었다. 문자의 형상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잊었으나, 종이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그 고문서 위에서, 서윤은 처음으로 살아있는 자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기록이 아니라, 말이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잊힌 시대의 문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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