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신은 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굶주려 죽어갔다. 그동안 인류가 바쳤던 광신과 숭배라는 이름의 제물은 신의 육신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대신, 그저 썩어가는 신체의 부패를 늦추는 데 소모되었다. 하늘은 더 이상 은총을 내리지 않았고, 성소의 촛불은 기름이 다해 파르르 떨리며 사그라들었다. 종교가 곧 법이었고 신앙이 곧 생존이었던 시대에, 신의 침묵은 곧 문명의 멸망을 의미했다.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지하 성소의 깊은 곳. 차가운 돌바닥에 뺨을 맞댄 채 깨어난 의식은 지독하게 무거웠다. 폐부 깊숙이 들어차는 공기는 폐를 찌르는 듯 날카로웠고, 머릿속은 깨진 거울 조각처럼 파편화되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본능적인 탄식에 가까웠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무너져 내린 석조 천장과 그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었다.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으나 느껴지는 것은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돌의 질감뿐이었다.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 옷자락의 거친 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육체가 기억하는 고통의 잔향이 이질적이었다.
그때, 성소의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횃불의 불꽃이 일렁였고, 지독하게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드는가, 사제여.”
고개를 돌리자 낡은 사제복을 걸친 사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절망에 절어 있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신의 은총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처참한 공포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다. 성소의 벽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울부짖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의 말은 비명에 가까웠다. 나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흔들렸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나는 보았다. 사제의 목에 걸린, 빛을 잃고 검게 변해버린 성유(聖遺)를. 그리고 그 성소 구석구석에 깃든, 신의 권능이 아닌 인간의 절망이 빚어낸 파멸의 냄새를.
나는 현대의 지식으로 무장했던 고고학자였다. 유물의 파편에서 역사를 읽어내고, 흙 속에 묻힌 문명의 흔적을 통해 진실을 추적하던 자였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신화가 아닌, 붕괴해가는 현실의 잔해였다.
“신이 버린 것이 아니라, 신이 죽어가는 것이다.”
내 목소리는 낯설고 건조했다. 나는 아직 이 몸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이 성소가 어떤 비극을 겪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신이 죽어가는 자리에서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더 이상 신의 은총에 매달리는 기도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세운 성벽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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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의 외벽 너머로 들려오는 비명은 환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神聖)이 거두어진 땅에서 인간이 겪어야 할 가장 원초적인 고통이었다. 나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서서, 이제 막 시작될 파멸과 재건의 역사를 응시했다. 신이 사라진 빈자리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 그 질문이 나의 영혼을 할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