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박준서 선배, 벌써부터 저를 그렇게 반겨주시면 부담스러운데요?"
하나는 짐을 정리하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준서는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책상 위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부담은 무슨요. 이번 학기는 작년보다 훨씬 밀도 높은 수업이 될 거예요. 특히 이번에 새로 들어온 교재는... 좀 특별하거든요."
그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하나는 커피의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평온하기 그지없었지만, 학원의 공기는 묘하게 정체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흐름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공기 입자 하나하나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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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문이 닫히고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칠판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함수들이 나열되었고, 분필이 부딪히는 마찰음이 정적을 깨웠다. 올림피아 아카데미의 수업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수의 질서 속에 숨겨진 우주의 법칙을 탐구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하나는 노트를 펼쳤다. 기초적인 미분 방정식부터 시작되었지만, 문제를 풀어나갈수록 기묘한 감각이 손끝에 머물렀다. 숫자를 나열하고 변수를 대입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을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때였다.
하나는 문제를 풀던 펜을 멈추었다. 순간, 강의실 내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칠판 위를 흐르던 분필 가루가 허공에 멈춰 섰고, 옆자리 학생들의 움직임이 정지 화면처럼 고정되었다. 창밖의 나뭇잎도, 흔들리던 커튼도 그 자리에 박제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어...?"
하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깨어 있는 듯한 기묘한 고요 속에서, 시간은 마치 끈적한 늪에 빠진 것처럼 느릿하게, 혹은 아예 멈춘 채로 늘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펜을 쥐고 종이 위에 숫자를 적어 넣는 순간, 멈췄던 시간이 마치 고장 난 시계태엽이 돌아가듯 급격하게 요동치며 쏟아져 들어왔다.
"하아, 깜짝이야."
하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본 것은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이 정교하게 짜인 수식들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의 틈새를 벌려낸 것일까.
강의실 구석, 깊은 그림자 속에 앉아 있던 김현우는 그 찰나의 왜곡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안경 너머로 하나를 응시하며 깊은 탄식을 삼켰다.
'시간의 틈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군.'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경외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학원의 깊은 지하에 잠든 고대의 유물들이, 한 소녀의 손끝에서 깨어나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