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칠흑 같은 어둠이 경복궁의 기와지붕 위로 무겁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만물이 숨을 죽인 정적 속에서, 오직 집현전의 어느 밀실만이 미세한 불빛을 내뿜으며 깨어 있었다. 그곳에는 조선의 하늘을 받드는 왕, 이도가 홀로 앉아 있었다.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벽면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흔들렸다. 왕의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담긴 작은 사발이 놓여 있었다. 북방의 거친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온 이 이질적인 물은, 달빛조차 삼켜버릴 듯 깊고도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도는 떨리는 손을 들어 사발을 입가로 가져갔다. 뜨거운 김이 코끝을 스치며 생경하고도 쌉싸름한 향을 피워 올렸다. 그것은 유교의 경전에서 맡아보던 은은한 먹향과는 달랐다. 오히려 대지의 심장부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거칠고도 강렬한 생명력의 냄새였다.
한 모금.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온몸의 혈관이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녕 인간의 정신을 깨우는 물이란 말인가."
그의 눈동자에 서린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고, 정신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벼려졌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수만 가지의 번뇌가 단숨에 정리되며, 마치 세상의 이치가 투명한 유리알처럼 명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공포가 사라진 자리에는, 전례 없는 지적 각성과 뜨거운 갈망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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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찬 바람이 문틈을 파고들었으나, 방 안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도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았다. 붓끝이 종이 위에 닿는 순간, 그는 직감했다다. 이 검은 물이 조선의 운명을, 아니 이 세상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불씨가 될 것임을.
그것은 축복인가, 아니면 파멸을 부르는 독인가. 왕의 눈동자 속에서 검은 파도가 소리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