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 순간, 실험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이준호가 들어왔다. 그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들어와 그녀의 곁에 섰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그는 화면 속에서 요동치는 데이터의 파동을 응시하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하나야,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것 같아. 이 선을 넘으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시작될지도 몰라."
그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걱정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서하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의 그래프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니? 준호 씨, 이건 통제가 아니라 해방이에요. 인간이 시간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굴레를 벗어던지는 기술이라고요."
그녀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하지만 준호는 그녀의 열망이 닿지 못하는 곳, 그 기술이 앗아갈 수 있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와 그녀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효율적인 시간 배분이 아니라, 조각난 기억과 뒤섞인 파편들이었다.
"기억의 파편이 사라질 때,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질 것 같아? 효율이 높아질수록 우리가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있다면, 그건 성취가 아니라 상실이야."
준호의 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하나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과거의 어떤 상처를 앓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여전히 붙잡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상실이라니요.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얻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예요."
서하나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준호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듯했다. 실험실 안의 정적은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으로 가득 찼다. 1980년대의 밤은 깊어갔고, 기술의 정점에서 탄생하는 혁신은 그들의 관계 속에서 차가운 윤리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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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나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숫자들이 이제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위험한 도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준호의 경고는 공중에 흩어지지 않고 그녀의 의식 밑바닥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풍요와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현재의 파편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서하나는 처음으로 망설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