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차갑게 식어버린 종이컵 속의 커피는 이미 향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강하빈은 자신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을 억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5년 전, 그가 가장 치열하게 살아있었으나 동시에 가장 눈이 멀어 있었던 공간. 가로등의 주황빛이 쏟아지는 이 거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래서 더 비현실적으로 그의 망막에 맺혔다. 사고의 순간,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 굉음과 함께 덮쳐왔던 죽음의 그림자가 이제는 아스라한 잔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는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폐가 찌릿하게 울리는 감각은 생생했다. 죽음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다시' 살아가고 있었다. 5년 전의 시간 속으로 던져진 이 기적 혹은 저주 같은 현상은 그에게 익숙한 풍경을 낯선 공포로 치환해 놓았다.
"이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그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졌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치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강하빈은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 닿는 온기는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기술적 성취라는 이름의 화려한 훈장 뒤에 가려졌던 추악한 진실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묵인했던 오류들, 성과를 위해 외면했던 윤리적 경고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방조했던 거대한 조직의 그림자.
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때의 자신은 영리했지만, 동시에 오만했다. 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찬란함에 매몰되어, 그 기술이 딛고 서 있는 토양의 붕괴를 보지 못했다. 그는 혁신가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실상은 그저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서 더 정교한 톱니바퀴가 되려 했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가로등 아래 서 있는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제는 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마주하게 될 것들, 그리고 그가 저질렀던 선택들이 불러온 비극의 씨앗들을.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단순히 기술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지 않도록 지탱하는 방벽을 세워야 했다.
그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익숙한 보도블록의 질감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과거의 끝이자, 그가 다시 써 내려가야 할 새로운 시작의 첫 문장이었다.